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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Oct 01. 2019

'꼰대'가 판치는 세상에서 위트 있는 '신사'를 꿈꾸며

[영화] 인턴(The Intern, 2015)


Thank you South Korea!


낸시 마이어스 감독이 직접 인스타그램에 <인턴> 관람객 200만 명 돌파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미국 제외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적이고, 총 360여만 명이 관람했다.)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전설 낸시 마이어스의 신작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흥행할 줄 몰랐다. 이준익 감독의 <사도>를 제치고 흥행 주간 1위까지 오르며 입소문을 제대로 타고 있단 걸 증명했다. <인턴>에는 마블 영화처럼 때리고 부수는 액션은 물론 특수 능력을 지닌 슈퍼 히어로가 없다. 물론, 현실 세계에선 절대 만날 수 없을듯한 70대 인턴 벤 휘태커(로버트 드니로)가 진정한 영웅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큰 초능력은 상대방의 진심을 단번에 알아차리는 눈치다. 충격적인 반전이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갈등도 없다. 그나마 30대 CEO 줄스 오스틴(앤 해서웨이)이 잘못 보낸 메일을 삭제하기 위한 잠입 액션(?) 정도가 가장 큰 고비다.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남녀노소 누구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보기 좋은 훈훈한 영화!" 정도로 소개할법한 <인턴>이 대체 왜 이렇게 인기를 끄는 걸까? 그리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니면 흥행하기 쉽지 않은 한국에서만 유독 말이다. 벤 휘태커란 비현실적인 '신사'를 그리는 한국인의 바람이 투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멘토와 힐링이 판을 치다 못해 이젠 식상해진 대한민국에서 벤 휘태커는 판에 박힌 캐릭터지만 충분히 그 존재 가치가 있다. 아울러 앤 해서웨이의 패션을 보는 재미도 이 영화의 상당 부분 차지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초짜가 어느덧 성공한 패션 CEO가 된 걸까? 줄스 오스틴은 정장, 캐주얼 가리지 않고 정말 옷을 세련되고 찰떡같이 잘 입는다. 이건 패션이 문제가 아니라 앤 해서웨이가 입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한편 그녀는 회사에서는 당당한 사장이지만, 인생에서는 인턴과도 같은 고민 많은 사람이다.



워커홀릭 30대 여성 CEO와 키다리 아저씨 70대 노인 인턴의 조합이 주는 시너지 효과는 상당하다. 최신 트렌드에 가장 민감하고 애플 전자기기로 상징되는 커리어우먼이 전자라면, 클래식한 슈트에 요즘엔 보기 힘든 손수건을 늘 들고 다니는 신사는 후자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각각 대표하는 두 주인공이 오해와 편견에서 시작해 화합과 우정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무척 뻔하지만 부담이 없다. 벤 휘태커는 줄스 오스틴이 집안일이든, 회사 일이든 벽에 막혔을 때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를 전해준다. 반대로 페이스북 같은 SNS에 익숙지 않은 노인에게 한 단계, 한 단계 새로운 문화를 소개해주는 에피소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마치 부모님을 모시는 것 같은 답답함에 줄스가 팀을 옮기라거나, 아무것도 도울 일이 없을 거라 단정 짓는다. 하지만 기계보다 정확한 인간 내비게이션 벤의 현명함에 녹아들어 더 이상 없어서는 안 되는 친구가 되는 스토리. 모두의 예상대로 <인턴>은 착하게 흘러간다. (놀랍게도 벤은 패션회사 건물 위치에 있던 예전 전화번호부 회사의 임원이었다.)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막장 드라마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혹시나 갑자기 벤이 건강 이상으로 쓰러진다거나, 아니면 줄스가 바람난 남편에게 잔인한 복수를 꿈꾸는 이야기가 나올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특별한 갈등 없이 훈훈하게 영화는 끝났고, 그게 이 영화의 특별함이자 장점이란 걸 다시 깨달았다. 혹자는 <사도>에서 회초리를 맞고 <인턴>에서 연고를 바른 느낌이라고 하더라. 벤 휘태커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다. 그리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따뜻하다. 그는 집 나온 인턴 동기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귀찮은 모닝콜까지 해준다. 두 손 가득 커피를 나르면서도 젠틀한 웃음을 날린다. 사내 연애에서 생기는 고민 상담 역시 노련한 벤 휘태커의 몫이다. "눈을 깜빡깜빡해야 한다"는 조언을 충실하게 따를 때는 귀엽기까지 하다. 인턴이라기보다는 '멘토'에 가까운 벤 휘태커는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를 적재적소에 전해주며 묵묵히 도와주고 응원하는 그런 사람.



특히 벤 휘태커의 가장 큰 장점은 '입은 닫고, 귀는 여는' 자세다. 그의 조언을 살펴보면 먼저 나서는 오지랖이 없다. 상대를 배려하며 적정한 선에서 이렇게 하면 더 괜찮지 않겠냐는 식의 조언이 전부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어떤가? 흔히 말하는 '꼰대', '개저씨'를 살펴보면 그들은 나이가 벼슬인 것처럼 행동한다. "내가 네 나이 땐 말이야~"로 시작해 "이렇게 좋은 상황인데 왜!"로 끝나는 오지랖은 끝이 없다. (쓰다 보니 <사도>의 영조와 정확히 일치한다!) 연애, 결혼, 취업, 학업, 종교, 정치적 견해. 고압적으로 파고드는 꼰대들의 관심 분야는 다양해서 불편하다.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일 그들을 경멸하고,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일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지금의 상황은 분명 비정상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손수건을 안 가지고 다니지.
그런데 자네, 손수건의 진짜 용도가 뭔지 아나.
바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거라네.


청춘이 원하는 건 '아프니깐 청춘이므로' 버티라는 허무맹랑하고 대책 없는 핀잔이 아니다. 그저 힘들 때 힘내라는 응원까진 아니더라도, 그저 "괜찮다"는 한마디의 위로가 필요한 법이다. 20대는 결국 50,60대가 되고, 50,60대 역시 20대의 세월을 지나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며 '세대전쟁'을 펼치기엔 우린 너무나 가까운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을 지니고 다닐 여유가 필요한 시기다. 벤 휘태커처럼 모두에게 힘이 되는 키다리 아저씨가 될 수 없겠지만,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만이라도 언제나 든든한 소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편, 최근 즐겨들은 스웨덴세탁소의 <두 손, 너에게>에서 최백호가 부른 부분이 <인턴>을 보고 나니 마음에 와 닿는다.


걱정 말아라 너의 세상은 아주 강하게
널 감싸 안고 있단다 나는 안단다
그대로인 것 같아도 아주 조금씩 넌
나아가고 있단다 캄캄한 우주 속에서
빛나는 별들을 찾아서 눈을 깜빡이는
넌 아주 아름답단다

- <두 손, 너에게>, 스웨덴세탁소


그나저나 출근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넥타이를 매는 벤을 보며 많은 걸 느꼈다. 24시간 중 깨어있는 시간의 2/3 이상을 보내는 회사. 그 공간을 향하는 나의 마음이 설렘과 기대보다는 두려움과 나태함이라면 얼마나 슬프고 힘들까? 내가 과연 70대가 되어도 단정한 양복을 차려입고 위트 있고 센스 넘치는 신사가 될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지만, 부디 회사가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공간으로 거듭나면 좋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현명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인턴>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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