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가 없는 안부전화
그날이 정말 무더웠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핸드폰 화면에 나타난 시어머니라는 네 글자에 얼어붙은 것만은 확실하다. 남편이 회사에 간 줄 알고 전화를 하신 것 같은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편은 집에 있었고 나에게 누구의 전화냐고 물었다. 어머니라고 하는 내게 전화를 받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찝찝했다. 결국 전화를 받았고 두어 시간 동안 쌓아두신 며느리에 대한 불만들을 쏟아내신 어머니와의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알았다. 이 전화 한 통이 나에게 미칠 영향은 약간의 찝찝함과는 비교 불가였다는 것을..
어머님은 다짜고짜 이 더운 날 전화 한 통이 없는 게 가족이냐고 물으셨고, 뜬금없이 친정 부모님을 소환하셨다
"정운이가 너희 부모님께 너처럼 한다고 생각해봐라.."
치사스러워서 이런 얘긴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은 내가 어머니와 멀어지기 전, 시댁을 일 년에 수도 없이 다녀 갔을 때 단 한 번도 친정에 간 적도 없고, 안부 전화는커녕 생신 때나 어버이날에도 나를 통해 통화를 했다. 나는 친정부모님께 남편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나를 통해 해달라고 말씀을 드렸고 그게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했다. 무더운 날 안부전화를 바라지 않는 친정부모님께는 남편에게 서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모든 걸 얘기하며 반박하고 싶었지만 내 입은 조개처럼 꽉 다물고 있었다.
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시어머니와 안부 전화를 주고받을만한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갈등이 깊어지고 내가 드렸던 안부 전화에는 안부만 있는 게 아닌 시어머니의 여러 가지 서운함이 쏟아져 나왔고 하루빨리 내가 예전에 말 잘 듣던 때로 돌아오길 바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너는 네 아이가 너만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그거 아니야. 우리의 아이 이기도 해.!!"
정말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 줄이야... 그동안은 내 착각과 편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명 산후조리부터 내가 봐온 모습은 아들과 정서적 분리가 전혀 되지 않았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손주에게 미쳤다. 손주를 손주가 아닌 아들처럼 모든 걸 아셔야 했고 그게 당연하셨다. 그럼에도 내가 예민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 수 있고 나아질 줄 알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권리는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지치게 했다. 어머님 입장에서는 손주는 매일같이 봐야 하고 보고 싶을 땐 언제든지 봐야 하는 위치에 있는데 자주 못 보니 불만이 쌓이셨겠지만 아이가 물건도 아니고 소유를 주장하시는 발언이 솔직히 불쾌했다. 아이는 내가 낳았지만 내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닌 하나의 인격체이다.(이 말도.. 못 했다.... 마음속의 메아리다..)
어머님께서 아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 나서 이상하리만큼 남편과 손주에 대한 애착이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아들이 아이를 낳고 한가정을 이루는 모습에 정말로 정서적으로 독립을 시켜야 한다는 불안감이 드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건강하게 남편을 독립시켜 주실 줄 알는데 손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실 줄은 몰랐다.
어머님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로 시작에서 그동안에 쌓인 모든 걸 쏟아붓기 시작하셨고 나는 듣고 있다가 도저히 듣기 힘든 얘기엔 내 입장을 이야기했지만 다양한 유형으로 듣지 않으셨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냥 계속 이야기하셨는데 예전에 식사자리에서도 봐온 모습이지만 상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 만한 여유가 없어 보이셨다.
들으면서도 도대체 무슨 의도가 숨겨있는 것인지 궁금했던 내용은 지속적으로 산후조리 때 이야기를 꺼내 신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의 일들을 내 인생에서 깨끗이 지우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었다. 그 시간을 꺼내고 싶지 않은 이유는 내가 몸과 마음이 바닥을 칠 때 존경하고 기대했던 인간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그마저 자책을 하며 보낸 그 기억을 잊고 싶지만 그럴수록 더 생생히 기억이 난다.
"조리 기간 때 네가 정운이가 애 밥 먹이는데 어머니 불편해요라고 소리를 질렀잖니!
그리고 밥 먹고 식기를 싱크대에 집어던지고, 미역 있냐고 물으니 뭐? 개미지옥?...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어머님 말씀 대로면 세상 이런 돼먹지 못한 며느리가 따로 없다..... 그 상황에 있던 남편이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 내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으셨던 건가.. 어디서부터 저런 왜곡이 시작된 건지 궁금했다. 나는 스트레스나 화를 글로 적고 일기를 오랫동안 써왔기 때문에 아마 일기에도 그때의 내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일로 남편과도 수없이 다투고 논쟁을 했기 때문에 들춰 보지 않아도 확실히 기억한다.
조리기간 때..라고 대충 시기를 잡으셨지만 정확히 댁에 가시기 전 날이다. 댁에 가실 때 아들과 탯줄이 연결된 것 같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남기시고 눈물바람으로 가신 날이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다. 가시기 전날에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상황에도 절대 댁으로 가지 않겠다는 시어머니를 설득할 방법이 더 이상 없었다. 나는 한 가지 부탁을 드렸다. 어머님께서 남편이 해야 할 일들을 다 해주시니 남편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러니 남편이 육아를 할 때는 지켜봐 달라고 했다. 어머님은 남편이 아이를 안거나, 밥을 먹여도 그 꼴을 못 보셨고 목욕도 남편이 오기 전에 씻기자고 하셨다. 좋은 의도라는 건 알지만 결국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었기 때문에 서툴러도 해봐야 했다.
그날 저녁 남편이 오고 밥을 먹으려던 찰나, 아이가 울었다. 내가 아이 분유를 준비하는데 직접 먹이겠다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겼다. 내가 남편에게 아이를 안겨주자 마자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아이를 달라고 하셨다. 어제 말씀드린 것도 아니고, 아까 말씀드린 건데 그 잠시를 어떻게 못 기다리시는지.. 여러 가지 쌓아 왔던 감정을 참지 못했다.
"어머니.. 제발요... 그냥 먹이게 두세요.."
나의 이 한마디가 저녁 식사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고 나는 식사자리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다음 날 나의 이 행동을 어머니께서는 예의가 없고 버릇이 없다고 문제 삼으셨고 내 행동에 나도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무조건 사과를 드렸다. 여기서 왜 어머니! 불편해요!! 소리를 친 얘기가 나온 건지 궁금해서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마 그럴 것이다. 없던 일이니까. 내가 예전 가족들과 식사자리에서 어머님께 부담스럽다고 한 얘길 두고 표정이 어땠다느니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따져대던 사람이 그런 일을 기억 못 할 리가 없다. 여기까지는 조금 부풀려서 말씀하실 수도 있다고 해도 식기를 싱크대에 집어던졌다는 얘기는 너무 어불성설이다. 그런 행동을 했다면 남편은 진작에 나와 헤어졌을 사람이다.
나는 어머님께 개미지옥은 아마 미역이 줄지 않는다는 얘길 미역 지옥이다라고 웃자고 한 얘기였는데 언짢으셨다면 죄송하다. (사실 이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어 인정했다.) 그런데 불편하다고 소리를 치거나, 식기를 집어던졌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했다. 내가 어머님께 그런 행동을 보였더라면 남편과도 이 문제로 수없이 다퉜을 것이고, 살면서 감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해본 적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결백을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결백이라지만 왜 이렇게 까지 하시는지 회의감이 마저 들었다. 다행히도 이 얘긴 끝까지 들으셨다.
"아니라는 거니? 그래 아니면 다행이다."
나는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속이 꽉 막히는 답답함이 밀려오는데 어머님의 대답은 너무나 심플하다.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 원인은 억울함과 답답함도 있겠지만 어머님께 비추어지는 내가 그런 행동을 보일만한 사람이라는 게 너무 큰 상처였다.
예를 들어 이런 느낌이다.
"너 지난번에 내 지갑 훔쳤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니 지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너 아니야? 아님 말고.."
나는 어머님께 지갑을 충분히 훔칠만한, 손버릇이 나쁜 사람이었단 것이다. 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거란 것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그동안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기본적인 예의는 갖춘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자책도 많이 하고 꾹꾹 눌러왔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조금 섬뜩하다. 식사시간에 말 한마디 안 한 것도 대역죄인으로 면전에 버릇이 없단 말을 들었 던 것도 내 나름에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긴 시간 동안 이런 일은 남편이나 시어머니와 나눠본 적 없는 내용인데 갑자기 이런 일들이 실제로 있던 것처럼 꺼내시고는 황급히 마무리하시는 이유가 뭘까. 이전에 문자로 교회 목사님처럼 훈화 말씀을 하시고는 중간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전화로 가족이냐고 따져 물으시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고 설명하다 보면 내가 천하에 나쁜 며느리가 될 수도 있고 실제로 고분고분 착한 며느리는 아니니 어머님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다. 그러나 우리 둘은 진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어머님 얘기를 듣고 있자면 정말로 내가 그런 것처럼 믿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말문이 막힌다. 브런치 글에도 이런 내용은 없다. 아무리 주관적으로 내입장에서 글을 쓴다 해도 내가 행한 언행도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숨길 이유가 내겐 전혀 없다.( 그래서 댓글에 나에 대한 악플도 적지 않았다.;;; ) 내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동안의 갈등을 오픈하면서 그 책임의 무게를 나에게도 짊어주고 싶으셨을까.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어머님께 책임을 묻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저 끊임없이 과거의 나와 비교를 하시고 돌아오라는 어머님께 우리는 현재에 있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어머님은 대화 내내 조급해 보이기도 했고 틈틈이 모든 상황의 원인은 나라고 애들러 표현하셨다. 내가 말이 없다가 차분하게 설명을 하면,
"네가 이렇게 잘 얘기해줬더라면..."
"진작에 부담스럽다고 얘길 했더라면.."
전과 다르지 않게 똑같이 설명을 드렸고, 부탁을 드렸지만 시어머니의 관심 밖 문제였을 뿐이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고 오래가자 어머님께서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들에 대해 나의 문제 될만한 행동이 있었음을 확실히 해두시고 싶어 하셨다. 산후조리 때의 일로 어머님과 갈등이 있던 것도 맞고, 내 마음속 한구석에서 어머님에 대한 마음의 변화가 있던 것도 맞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아물 줄 알았다.
그런데 어머님의 그 안부전화 한 통이 나의 감정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줄은 전혀 몰랐다. 나는 산후조리 후에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나를 대하셨던 어머님의 행동들 하나하나가 떠 올랐고 그때의 어머님은 나의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으셨단 것도 이번을 통해 알았다. 선의에서 출발했던 어머님의 관심들은 애당초 나에 대한 선의와는 무관했던 것을 나는 왜 그토록 자책하고 괴로워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텼던 것이 앞으로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나니 그간 모든 시간이 허무해진다. 상황을 왜곡시켜 나 자신을 스스로 믿지 못하게 하시는 어머님께 그동안 내가 전했던 진심이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나는 더 이상 시어머니와의 관계의 단절을 두려워하지도 피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그동안 시어머니 관심과 친절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이유로 마치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자책을 했다. 왜 반복해서 자신을 몰아세우고 괴롭혔는지 되돌아보면 평소 어머님은 잘못의 원인을 습관처럼 내게서 찾으셨다. 잘못을 나에게 떠 넘기며 지속해서 자존감을 깎으셨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불신이 가득했다. 어쩌면 이게 가스 라이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마지막 대화에서 알았다. 결국엔 내가 과거 착한 줄 알았던 며느리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자 남편 생각은 하지 않느냐와, 아버님이 잠을 못 주무시며, 아버님과 아들은 무슨 죄냐며 감춰 두셨던 죄책감 카드를 꺼내셨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잠에 들지 못했다. 두 시간 동안 어머님께서 했던 이야기들이 나의 일상을 흔들었고, 후유증이 꽤 오래 남았다. 그렇게 통화 후 명절 때 시가에 가기 전날 남편이 거실에서 시어머님과 영상통화를 하는데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화장실을 수없이 들락였다. 시어머님의 목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고 온몸이 경직이 됐다. 나는 앞으로 나에게 무례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시어머니께 정당한 공격성으로 맞서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런데 마음과 다르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내 몸은 이미 나 자신을 괴롭히고 학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웬만한 상처와 아픔은 잘 흘려보냈는데 이번은 다르다. 떠오를 때마다 고통스럽고 불현듯이 생각나 진정이 되지 않는다.
적당히 무뎌지고 묻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참으로 융통성이 없다. 특히나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나로서는 불편한 사람 앞에서 불편한 내색은 애써 감추겠지만 편한 척은 절대 못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머님 앞에서 불편한 내색을 감추는 것조차 나에겐 너무 어렵다. 안되는걸 억지로 하려면 병이 난다. 나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어머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게 화가 단단히 나셨고, 한바탕 쏟아부으셨다. 남편과의 약속으로 명절이나 생신 때는 봬야 하지만 의무적인 만남을 제외하고는 더욱 적극적으로 그 무엇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야 내 마음속에 어머님도, 상처도 함께 옅어질 것 만 같다. 시어머니의 존재가 커질수록 나의 마음의 병도 커지는 걸 보면 앞으로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