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의 변심
누구나 완벽한 결혼을 꿈꾸지만 말 그대로 꿈이다.
나는 친구들도 인정한 고독사 1순위였다. 집순이 오브 더 집순이라 집 밖은 나에게 전쟁터같이 위험했다. 하지만 막상 나가면 힘들게 나와서 인지 누구보다 신명 나게 놀았다. 이런 내가 결혼을 포기했던 건 몇 번의 연애와 혼자의 시간들이 결혼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이 넘어서 시작한 연애는 첫 연애라 나도 어느 정도 잘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런데 남자 친구와 헤어질 시기에 나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야.. 진짜 내가 맨날 커플 요금제 600분 다 쓸 때 너 몇 분 남았는지 알아?.. 545분 남았었어...."
저 숫자가 잊히지가 않는다.. 난 그 이후로 친구들에게 죄수번호 545였다...
나는 그 후로도 바뀌지 않았다. 남자 친구들은 나에게 늘 서운해했고 나는 노력해도 그들에겐 너무나 모자랐다. 단지 타인에 대한 관심의 표현 정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는 유독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집은 사적이고도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라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결혼하고 남자들이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게임도 하고, 피규어 정리도 해야 하는데 여자 친구가 집에 가지 않는 느낌)
서른이 다 되어 갈 무렵 만났던 남자 친구와는 물 흐르듯 특별한 문제없이 연애를 있어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연애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이야기라 당황스럽기도 했고 문득 겁이 났다. 그 얘기를 들은날 꿈을 꿨다. 연애처럼 결혼도 물 흐르듯이 하게 되었는데 너무 후회하면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던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순간 '다행이다..' 나는 안도했다. 서른이 다되도록 해보지 못했던 것이 너무나 많았고 결혼을 해서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연애의 끝을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친구와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몇 년간 혼자가 되었다.
비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3년간 혼자의 시간을 보내면서였다. 처음에는 일부러 혼자의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그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더 이상 결혼이라는 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느어무 행복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었던 공부도 하면서 자격증도 따고 다양한 취미생활도 하면서 그렇게 나 혼자 산다 매력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래서 운이 좋으면 연애를 하면서 혼자의 시간을 유지하고 싶었고 그렇지 않으면 어차피 인생 혼자 가는 거 맘껏 누려보리라.. 다짐했다.
그런 내가 결혼을 하게 됐다. 연애도 정말 조용히 했고 결혼 소식도 청첩장이 나올 시기에 조금씩 알리기 시작했다.
"야..... 청첩장이 왜 거기서 나와?!"
친구들에게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 그 누구도 내 가방 속 작은 봉투가 청첩장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들의 살기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집에만 있던 나에게 이성을 만날 기회는 단연 없었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나가는 회사가 있었다. 남편을 만난 곳은 회사였다. 아는 사이가 아니라 가까워질 기회가 없다가 친한 동생의 고마운 오지랖으로 다 같이 어울리며 친해지게 되었다. 남편은 밝고 잘 웃는 사람이었지만 눈치는 언제나 출근할 때 집에 두고 와서인지 사귀지 않고 썸만 수개월을 탔다. 겨우겨우 챙겨 온 눈치로 사귀자는 말을 건넬 때 나는 대답 대신 다른 얘기를 했다.
"나는 결혼 생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
서로 나이도 있는데 연애만 생각해도 괜찮아?"
남편은 괜찮다고 했지만 자신은 비혼 주의자는 아니라고 했다. 솔직히 그때 결혼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김칫국물을 한 사발 들이키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실제로는 네까짓 게 가소롭다고.....) 내가 남편에게 했던 이야기에 변명(?)을 조금 늘어놓는다면..... 서른이 넘어서 하는 첫 연애에 결혼이라는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게 싫었다. 결혼에 따른 묵직한 조건들을 아예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상대방 역시 나를 결혼 상대자가 아닌 그저 '나 ' 로만 봐주길 바랬다. 그냥 결혼이 자신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서로 결혼과 잠시 떨어져서 학창 시절에도 안 해본 풋풋하다 못해 답답해서 속 터지는 느린 연애가 시작됐다. 나이는 당장 애부터 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지만 우리는 급할 것도 없었고 차도 없었다. 차가 없었기 때문에 막차시간까지 함께 있는 소중함이 커졌고, 걷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들면서 정말 자연스럽게 결혼 얘기가 오갔고 예전에 두려움이 아닌 설렘으로 감정이 변화가 됐다.
결혼을 하고 나서 좋았던 점은 오늘 헤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시간을 내서 약속을 잡지 않아도 가장 친한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
내가 살면서 둘이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팠을 때도 아닌고, 밥을 혼자 먹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자기 전에 서로의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잠이 드는 것이다. 마음의 병은 내면의 감정을 밖으로 보내지 못할 때부터 시작이 된다는데 당분간은 그런 병이 걸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집구석에만 박혀서 목 늘어난 티셔츠와 무릎이 저 앞까지 마중 나온 운동복을 입고 이불과 한 몸이 돼있던 내가 결혼을 했으니 지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결혼을 일찍 시작한 친구들과 다르게 나를 보고 내버렸던 희망을 다시금 가져보는 미혼 친구들에게는 나의 결혼 생활은 초미의 관심사이다.
정말 행복하고 내가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인 건 맞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가 있어서는 아니다. 정말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 행운이다. 나도 혼자가 불안했을 때가 있었다. 다들 자기 짝들 만나서 결혼도 하고 떡두꺼비 같은 자식도 낳아서 잘만 살던데 왠지 모르게 뒤쳐지는 것 같았다.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느냐를 수없이 되뇌었다. 조금 늦는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고 늦게 라도 내가 함께할 사람을 제대로 만나는 게 중요하다.
나는 원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연애를 할 때도 너무 긴 시간 데이트하는 것을 힘들어했고 일정 시간은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혼자의 시간을 좋아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함께가 편하지 않아서였다. 내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편했던 것이다. 남편은 그동안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하게 해 주었고, 혼자가 제일 편했던 나에게 둘이라 더 재밌고 즐겁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남편을 만나면서 나의 연애 과정을 지켜본 친구들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 그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지금 나의 변한 모습을 본다면 아마 널 죽이러 올 거라고....
(그땐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미안..)
나도 내가 누군가로 인해 변할 줄은 몰랐고, 결혼을 할 줄도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에서 멀어지니 결혼을 하게 됐고, 결혼에 대한 부담과 조건을 빼버리니, 결국 많은 것들이 더해졌다.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사람을 알아차리는 것은 서로가 완벽하게 들어맞아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수많은 조건들이 맞지 않아도 충분했다.
살다 보면 너무 행복하고 좋은 일만 있는 것 같아도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힘든 일도 생긴다. 그런데 그 어느 누가 거기까지 미리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을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그 고비들 앞에서 서로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진정한 모습이 나온다. 내가 나보다 더 생각하게 되는 사람일 때 그 고비는 작은 해프닝이 되고 서로가 더욱 단단한 관계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불운이 되어 버린다. 나 역시 가끔 남편이 열 받게 할 때가 있는데....(주식 말아 잡수셨을 때? 게임기 몰래 샀을 때? 비트코인&:$;&;'다시@$1$/생각해도ㄱㄴᆞ열받네)정말 사랑의힘으로...극복하곤한다...씁씁후후
결혼을 하고 싶은 이유가 사회가 정해놓은 결혼 적령기가 돼서, 너무 외로워서, 주변에서 다하니까 나도 해야 할 것 같아서라면 잠시 멈추길 바란다. 그렇게 결혼을 한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고 혼자의 삶이 불행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속도에 쫓기느라 방향을 잠시 잃었다면 살짝 판단력이 흐려질 수도 있다. 혼자의 시간들이 정말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때 보이는 사람과 만나보길!!.(아무도 안 보이면 혼자도 나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