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살에 입사해서 14년을 꽉 채운 회사를 퇴사했습니다. 아마도 2016년에 6개월간, 2023년에 2주간, 퇴사한 것에 이어 같은 회사만 3번째 퇴사하는 것입니다.
처음엔 내 말을 안 믿어줘서 반항심에
두 번째는 나도 남들이 아는 회사를 다니고 싶은 허영심에였습니다.
세 번째는.. 한 단어로 말하자면 도망입니다.
새로운 기획안이 통과되었단 기쁨으로 PM을 자처한 것이 화를 불렀나 봅니다. 재지 않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가, 파르륵 타버리는 줄 알았어요. 자만이었어요. 만들어 내는 것만 익숙한 제게 영업괸리는 정말이지 어렵더라고요. "내 책임이 이만큼까진 아닌 것 같다." 생각과 "그래도 내 책임이 아니진 않다 "라는 생각이 매주 부딪혔습니다.
경력이 무색하리만큼 깨지고, 저는 또 누군가를 탓하게 되는 못난 순간순간들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 도망치기로 결심했어요. 매주 닦달하는 그들을 도저히 감내할 수 없더라고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대며 돌파구를 찾으려 했고 무너진 자존감을 올렸습니다.
그러던 중 똑똑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네요. 한계산업에서는 컴팩트한 조직구조로 다양성을 모색해야 한다는.. 등등하고 말이죠.
덕분에 저는 2명의 팀원에게 퇴사통보를 했고 본사는 긱팀의 뼈대만 남긴 채 모회사의 한편으로 입주하기 되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 상황이 저는 참 모멸스럽더라고요.
사장님이 팔고 간 회사, 남은 경영진도 똑똑한 누군가에 의해서 좌지우지해야 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래서 좀 더 나은 조건으로 도망치기로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었으니까요.
정말이지 감사하게도 좋은 조건이 주어져, 그놈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입주 2주 전인 오늘, 막 퇴사를 했습니다.
분명 임원진의 격려도 받았고 구성원의 응원도 받았는데 발갈음이 참 무거워요.
마지막 면담에서 한 말처럼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일등항해사를 잃었다고 표현해 준 친구에게 고맙고, 새벽 출근으로 눈까지 충혈됐으면서 저보곤 꽃길만 걸으라던 친구에게 고맙고, 나한테 물어보면 될걸.. 신경 쓰지 말라며 여기저기 묻던 친구에게 고맙고, 권고사직 당하는 마당에 카드와 선물까지 남겨준 친구에게 고맙고 미안합니다.
갱년기도 아니고 처음도 아닌데 왜 이런가 몰라요.
자기 전 아이가 이렇게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엄마가 퇴역한 본부장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잘하게 해 주세요" 하고 말이죠.
비록 도망에서 시작했지만
진짜 훌훌 털어버리고 잘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