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도 발전한다.
나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 잘 모른다. 책을 읽어본 적도 없고 사회주의를 비판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시대의 전환과 정치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위의 5단계 역사 발전론이 잘못되었다는 단편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5단계의 역사 발전론은 역사가 무계급의 미래 공산주의로 갈 것이라고 1800년대에 주창한 이론이다. 19세기 극심한 자본가의 착취를 보고 마르크스는 피착취민이 세상을 뒤집어 계급이 없는 세상에 사는 미래를 꿈꾸었다. 그리고 그 실험들은 20세기 초 공산주의 열풍을 몰고 왔었다.
그렇지만 현재 세상 어느 나라도 무계급의 사회는 없다. 제한된 자원을 더 많이 얻기 위해 더 치열한 경쟁이 있고 더 많은 부가 만들어졌다. 경쟁은 치열해지고 있지만 노동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사람들은 점점 더 잘 살게 되었다.
경쟁을 통한 기술의 발전과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 부의 양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엄청난 속도로 불어났다. 돈이 많아지다 보니 기업들도 조금 더 직원들에게 많은 월급을 주고 베풀기 시작했다. 이른바 낙수효과가 나타난 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면서 매슬로의 이론에 따라 욕망의 대상도 발전해갔다. 수천 년간 인간의 욕망의 대상은 생존이었다. 의식주의 해결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부를 만들면서 더 좋은 의식주를 뽐내며 계급을 나누는 소속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더 맛있는 거, 더 편한 거, 더 재밌는 것의 시대를 거쳐 "더 의미 있는 것", 즉 자아실현의 시대로 옮겨갔다. 그러한 자아실현의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스타트업의 붐을 일으켰다.
기존 강고한 대기업들의 마켓의 틈새를 비집고 스타트업 붐이 일어나면서 자본주의는 또 한 번 발전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바로 어제까지 노동자였던 사람이 스타트업 자본가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비전을 공감하고 투자하는 사람들은 벤처 캐피털을 조성해서 자본금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스타트업에 합류하는 사람들도 스톡옵션을 통해 노동자이면서 자본가인 상태가 되었다.
1800년대 마르크스는 인간의 욕망이 더 높은 레벨의 욕망으로, 나아가 대중이 자아실현을 위해 살 수 있는 상태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굶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굶어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보다 나보다 더 좋은 명품을 쓰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 더 큰 욕망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나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을 지켜보고, 자신의 삶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의미 있는 삶"의 욕망들이 터져 나오는 곳이 스타트업들과 그들에게 투자하는 VC들이다. 그리고 이 경제체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노동자가 자본가도 되고 자본가가 노동자도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옛날에 "개천에서 용 나는 일", 즉 계급 간 이동은 국가고시에 합격하거나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그러한 것들이 갖는 임팩트는 제한되었다. 사시가 아닌 로스쿨을 가야 하고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계급 이동이 늘어났다.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노력해서 사시에 붙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계급 간 이동 가능성이 급격히 떨어진 것은 아니다. 계급 간 이동의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모든 사람이 희망하는 것(대기업, 고위 공무원 등)을 해야 계급 상승을 이루던 시대에서 내가 잘하는 것을 잘하면 계급 상승을 이루는 시대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스타트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유튜버를 잘해도 계급 상승이 되고 인스타를 잘해도 된다. 연예인이 되어도 되고, 공부를 잘해도 되고, 게임을 잘해도 계급 상승이 가능하다. 스타트업계는 자아실현이 가치로 전환되는 판이 가장 크고 체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