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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현 May 07. 2018

34. 워킹대디의 하루

워킹맘과 워킹대디가 똑같은 생활을 하는 실리콘밸리의 하루


아침 8:15. 아내와 15개월 된 아이와 말티즈 개 루루와 함께 집을 나선다. 우리 가족은 운 좋게도 내가 회사 가는 길에 아이의 데이케어와 아내의 직장이 있어서 차 한 대에 네 식구가 타고 함께 타고 출근한다. 아이는 뒷좌석에서 엄마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논다. 루루는 조수석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함께 출근한다.


8:45에는 아이를 데이케어에 데려다준다. 늘 그렇듯 아이는 데이케어에 도착하면 울음을 터트린다. 처음에는 걱정도 되고 마음도 아팠지만 곧 그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용하는 데이케어는 총 세 명의 아이를 돌보는데, 선생님이 종종 휴대폰으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내준다.


9시쯤에는 아내와 루루를 아내의 직장에 내려준다. 루루는 회사에서 꽤 사랑을 받고 있다. 많은 동료들이 루루를 보러 사무실에 찾아온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아내를 따라 주변 바닷가 산책로를 걷는다.



9시 반쯤에는 회사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는다. 아침에는 주로 오트밀과 과일, 그리고 빵을 먹는다.


10시부터 앉아서 지라 애자일 보드를 점검하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코딩을 한다. 열린 공간이지만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쓰기에 집중은 꽤 잘되는 편이다. 종종 다른 엔지니어나 매니저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주말에 뭐 했는지, 어제 뭐 했는지, 새로 나온 게임이나 넷플릭스 쇼는 뭐가 재밌는지, 애는 잘 크는지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새 서비스의 설계에 대한 방향이나 서비스 구현 관련 의사 결정에 관한 업무 이야기도 한다.


회의는 하루 한두 개 정도가 있거나 없을 때도 있다. 필요할 때마다 랜덤하게 잡히는 미팅도 있지만 많지는 않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팅은 금요일 아침 10시에 하는 스프린트 계획 미팅이다. 한 주간의 일을 돌아보고 다음 주에 할 일을 계획하는 시간이다.


한 주간의 일을 돌아보는 Retrospect 시간에는 잘된 것, 잘못된 것을 구글 독스에 타이핑해서 넣는다. 잘된 것에 ‘프로젝트 런칭’, ‘새로운 팀원 환영’ 등이 들어가는데 농담이 반이다. ‘우리 아기가 밤에 깨지 않고 통잠을 잤다’, ‘새 자전거를 샀는데 awesome 하다’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넣어 서로에게 웃음을 준다.


잘못된 일에는 ‘지난주에 계획한 목표를 채우지 못했다’,  ‘다른 팀과 싸웠다’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써넣는다. 목표를 채우지 못한 경우에는 목표 포인트를 조정하여 팀의 속도가 목표에 제대로 반영되도록 한다.  목표와 데드라인에 맞추어 팀의 속도와 일의 양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속도에 따라 목표와 타임라인을 수정한다. 팀의 속도가 예측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급하게 일 하지 않고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점심은 주로 파스타, 샐러드, 고기가 나오는데 아주 건강한 식단이다. 6개의 옵션 중에 5개가 샐러드이고 심지어 수요일은 채식의 날이어서 고기가 아예 안 나오기 때문에 투덜거리는 사람도 많다.


오후에도 코딩과 미팅을 하고 5시에는 퇴근을 해서 5:45에 아이를 픽업한다. 그래서 5시 이후에 있는 미팅에는 참석을 못한다. 5시 이후에 미팅을 잡는 일도 거의 없지만, 4시 미팅이 길어지는 경우 “Sorry, I gotta pick up my baby.” 하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다.


모든 기업이 다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아이 픽업을 제시간에 하는 것이 회사의 회의보다 중요하다. ‘가족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이 픽업을 늦게 하면 데이케어에 벌금을 내야 한다. 데이케어 선생님들의 시간도 내 시간만큼 중요하다. 내 회사의 회의로 인해 데이케어 선생님들의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다.


아내와 루루를 픽업하고 아이를 픽업해서 집에 온다. 집에 도착하면 6:15 정도가 된다.


월요일 수요일은 내가 운동하는 날이고, 화요일 목요일은 아내가 운동하는 날이다. 운동하는 사람은 우유 같은 걸 간단히 먹고 운동을 하러 나간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아내는 Barre3라고 하는 요가, 발레, 필라테스를 합친 운동을 하러 간다. 운동을 가지 않은 사람은 아이 밥을 먹이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아이 보는 일은 힘들지만 꽤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이다.


9시 이후는 아이가 자는 시간이자 나와 아내 중 한 사람이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다. 아이는 9시쯤에 잠이 들어 이튿날 아침 8시까지 잔다. 아이가 잠든 이후에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회사 일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게임을 한다. 아주 평화로운 시간이다.


처음에 아내를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돌볼 때에는 아이 보는 것이 힘들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계속 물어봐야 했고 아내의 방식에 비추어 잘못된 것은 없는지 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런데 내가 아내의 아이를 봐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를 내가 본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보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내가 주도적으로 아이를 돌보다 보니 내 육아 방식도 생겼고 아내와도 서로의 육아 방식을 존중하게 되었다.


아이의 데이케어 일정에 맞추어 살다 보니 주중에 저녁 약속을 잡기란 정말 어렵다. 다른 친구들도 주중 저녁에는 가족과의 일정이 있어서 만나기가 쉽지 않다. 대신 주말에 친구의 가족들과 함께 놀곤 한다.


아빠가 되고 나니 주중 저녁 모임이나 회사 팀에서 하는 게임 나잇, 맥주 한잔 하는 해피아워에 참석하기가 어려워졌다.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갈 수는 있겠지만, 차 한 대로 움직이는 우리 가족은 픽업 일정 등 계획해야 할 것이 많아 번거롭다. 아이 때문에 사회생활에 제약이 생기긴 했지만, 아이는 정말 좋다. 나를 닮은 아이가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하고 재밌고 즐거운 일이다.


글: Will.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기업 문화와 조직에 관심이 많음.


그림: Chili. 디자이너. 생각을 그림으로 요약하는데 관심이 많음.


Project Group 실리콘밸리를 그리다 / 페이스북


** 다음 주에는 크리스틴의 실리콘밸리 워킹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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