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충격 실화 소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을 떠나 인천까지 12시간의 비행을 했다. 우리 제은이는 참 의젓하게 그 긴긴 비행을 잘 버텨냈다. 아이패드에서 보는 핑크퐁을 좋아라 하고 보다가도 피곤할 때에는 꼭 아빠한테 치대곤 했다.
24개월이 되기 한 달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랩 인펀트 비행이다. 비행기 자리를 따로 사지 않고 아이와 비행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 다행히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이를 옆자리에 앉히고 왔지만 아이는 늘 관심이 필요했다. 채 10분도 혼자 있는 법이 없었다. 제은이에게 핑크퐁이나 뽀로로를 틀어주고 대한항공에서 제공해 준 예쁜 기내 아기용 헤드폰을 씌워주면 집중해서 보곤 했다. 그렇지만 내가 이어팟을 끼고 다운받아 온 팟캐스트를 들을만하면 이내 아빠를 찾곤 했다.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우리 제은이와의 비행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12월 30일에 5일간의 하와이 여행을 다녀온 우리는 참 재밌는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아이한테 여행 중에 건강한 음식을 해 주지 못해서 많이 미안했다. 매끼 우리가 먹는 맛있는 관광지의 식사에서 제은이에게 줄 것을 나름대로 마련했지만 빵과 과일을 제외하면 제대로 먹는 것이 없었다. 우유로 배를 채우는 일이 너무 많았다.
미국에서 데이케어를 보내다 보니 한국 기준의 건강한 식생활은 지켜주기 어려웠다. 데이케어 선생님은 미국 기준으로는 건강식이라고 생각하는 오가닉 과자들을 매일매일 주었다. 그래서 제은이는 우리가 준비한 도시락을 번번이 거의 손도 대지 않고 남겨왔다. 그와 연관이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도 아토피 증상이 나타났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제품과 과자가 아토피에 안 좋다고 나왔다.
아이의 얼굴에는 하얀 반점 같은 것이 생겼다. 예쁜 얼굴에 그런 피부병이라니. 너무너무 속상했다. 하와이에서 많은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제은이의 식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 교수였던 나의 어머니는 평생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시고 연구 활동을 하셨다. 아버지는 늘 바쁘셨고 새벽에나 들어오셨다. 두 분 다 너무나 사랑 많고 좋은 엄마 아빠였지만 함께 있는 시간은 다른 가족들에 비해 부족했다. 나는 그래서 부모님과 아이가 떨어져 있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거나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자란 내가 트라우마가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성격 형성에 그 영향이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겠다.
나는 어려서부터 잘난척하는 꼬마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40을 목전에 둔 이제야 그 말이 어렴풋이 이해가 될 정도로 평생의 미스터리에 가까운 말이었다. 내가 좀 독특한 아이이기는 했다. 늘 질문하고 발표하는 아이였고 토론을 즐기는 아이였다. 엄마랑 논리적인 토론을 하는 데에도 익숙해서 그런 것 같았다. 반면 내 감정을 드러내거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은 떨어졌다.
20대 때 연애를 하면서 참 많은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7년을 사귄, 내가 나름대로 너무너무 사랑했던 여자 친구가 헤어지기 전에 나에게 한 말은 나를 만나서 행복했던 시간보다 힘든 시간이 많았다는 말이었다. 7년이나 그런 시간을 보냈다니... 정말 미안했고 그 친구와 결혼까지 하는 것은 우리 서로에게 얼마나 괴로운 일이 될지를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녀는 나를 양육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내가 엄마에게서 받지 못했던 많은 사랑을 주었고 나는 그녀의 사랑 안에서 더디게 성장했다. 10살 이전의 감정의 성장 과정을 20대에 겪은 것이다. 지금도 그 친구에게는 깊은 미안함이 있다. 얼마나 그 사람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는지는 그 후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함께 같이 성숙해가고 아이를 유산을 통해 잃어보고 제은이를 얻어 키우면서 점점 더 절감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랑 아빠랑 어렸을 때 떨어져 지내면서 가정부 할머니의 손에서 크면서 나는 내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잘 터득했다. 내가 감정적으로 힘든 모습을 가정부 할머니께 털어놓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가정부 할머니는 걱정하시며 엄마에게 이야기했고 그러면 엄마는 바쁜 중에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안아주고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나는 내심 미안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에 점점 무관심해졌다.
그리고 한국의 여느 아이들처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였다. 나는 늘 반에서 2등이었다. 완벽주의자도 아니었고 공부를 하려고 압박을 갖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공부를 즐겼다. 엄마가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공부 잘하는 똑똑한 큰아들이었다. 항상 2등이었고 1등을 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중학교 때 전교 등수는 항상 20위권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엄마가 통제를 하지도 않았고 누가 공부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사회와 엄마가 공부를 잘하면 나를 가치 있게 여긴다는 메시지는 늘 받았던 것 같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나에게 컴퓨터는 너무 좋은 친구였다. 나는 수학을 못했다. 평생 동안 수학을 못했다. 수학 이론은 좋아했다. 수학의 논리들은 좋아했다. 다만 계산이 안 되었다. 나는 완벽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쓴 글씨를 오독하여 6이 8이 되기도 했고 덧셈 뺄셈 실수도 많았다. 수학의 미적분등의 개념은 이해하지만 산수가 안 되는 나에게 컴퓨터는 너무나도 잘 맞는 친구였다. 논리를 내가 만들면 계산은 알아서 다 해 주니까.
수학을 그렇게도 못했던, 아니 수학적 이해는 했지만 꼼꼼한 성격이 못 되어 산수를 못해서 수학 성적이 엉망이었던 내가 실리콘밸리에서 완벽주의자들로 가득한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들과 함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기적은 아니다. 실리콘밸리는 한국의 획일적인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엔지니어인 나이지만 내 토론 능력, 리더십, 논리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들에게 특별한 평가 기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1:1 인터뷰였다. 1:1로 45분간 이야기를 나누면 한 사람의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수학적 완벽성을 중요시하는 구글의 면접이나 페이스북의 면접은 번번이 떨어졌다. 함께 프로덕트를 만들어갈 열정적인 사람을 찾는 주식 상장 전 스타트업이었던 트위터와 에어비앤비에서만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혼자서 자라온 나인지라, 아니 혼자서 자란 것은 물론 아니었다. 엄마 아빠는 늘 매일매일 함께 있었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엄마 아빠보다는 가정부 아줌마와 할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보낸 나였기에 아이를 장모님 댁에 몇 달간 보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 점 중 하나가 가정부 아줌마와 함께 자라서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서툴다는 것이다. 밥과 설거지는 우리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해 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부잣집 도련님 같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물론 이 나이에 그런 말들은 비난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친구들은 내 태도와 언행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리 부잣집 출신도 아니면서 아마 행동은 여느 부잣집 아이들보다 더 스포일 된 아이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제은이는 내 배 위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내 배 위에서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다. 그렇지만 비행기에서 내 배 위에 아이를 몇 시간 동안 재울 수는 없는 일이기에 아이를 옆자리에 눕히려고 하면 깨는 일이 두 번 있었다. 정말 미안했다. 서툴게 옮기는 과정에서 팔걸이에 머리를 부딪힌 제은이는 잠결에 나를 보면서 머리를 만지며 아야아야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아이 같으니라고.
세 번째 아이가 내 배 위에서 잠들기 전 나는 내 큰 배낭과 베개, 이불 등을 활용해 옆자리에 아기가 누울 수 있는 침대를 만들었다. 식탁의 높이까지 가방과 베개 등을 평평히 쌓아 올려서 안정적인 침대를 만들었다. 어릴 때 토요일마다 보던 맥가이버가 생각나며 뿌듯했다. 세 번째 내 배 위에서 아이패드로 핑크퐁 자장자를 보면서 잠든 아이를 내가 만든 침대 위에 눕히는데 성공!
아이는 세 시간을 잤다. 나는 팟캐스트를 듣거나 리디북스에서 전자책 “축적의 길”을 “수진”의 목소리로 들으며 게임을 하다가 맥북을 꺼내 쓰고 있던 책 원고를 다듬었다. 축적의 길에 나오는 내용들이 실리콘밸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산업의 앞길에 대해 고민해 보는 내 원고와 맥이 깊이 닿아 있었다.
세 시간 동안 천사같이 자는 아이를 보면서 문득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와이 여행 후 장모님께 아이를 맡기기로 한 우리는 비행기표를 알아보았다.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사용해서 오가려고 했는데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비행기는 1월 19일까지 만석이었다. 그런데 1월 1일 비행기는 탈 수가 있었다. 우리가 간단한 가족회의를 한, 하와이에서 돌아온 다음날은 12월 30일이었다. 가장 빨리 출발할 수 있는 비행기는 12월 31일 11시 20분이었다. 출도착 시간을 계산해보니 한국에서는 1월 1일 오후 5:30에서 8:20까지 2시간 50분을 있을 수 있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표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미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12시간 동안 제은이와 비행 후 장모님께 맡기고 바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나와 제은이를 데려다주던 아내는 나에게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더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제은이를 위해 이모님을 고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문득 머릿속이 번쩍 했다.
“응? 우리 돈 있어. 이모님 고용할 수 있어.”
“그럼 제은이 왜 가?”
뭐지? 나는 왜 이모님 생각을 못했지? 이런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음 그래도 장모님 사랑받으면서 한국식 식습관도 완전히 자리 잡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장모님과 엄마도 너무 보고 싶어 하시고 말이야. 한국말도 더 배울 수 있고 말이야. 우리와는 어차피 평생 같이 있을 거잖아. 그리고 우리도 2년 동안 육아에 너무 힘들어져 있는 것 같아. 재충전을 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럼 보내는 것이 맞고”
아내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그 어떤 말도 이모님을 모시지 않고 아이와 몇 달간 떨어져 지내는 결정을 한 이 순간을 합리화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아내는 우리가 아이를 이런 식으로 포기하고 장모님께 보내는 것은 부모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라며 자책했다. 나는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제은이와 우리를 모두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회사일과 책 쓰는 일을 병행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아내는 이직 과정에 있었다. 우리 둘 다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시간도 많이 부족했다.
보딩을 기다리며 게이트에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서 우리는 커리어를 위한 시간을 벌고 육아에서 휴식하며 제은이는 식습관도 바로잡고 할머니들과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단어 사이사이에 숨은 복잡한 감정의 엮임 들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제은이가 우리에게 배신감을 느낄까? 엄마 아빠랑 안 친해지면 어떡하지? 우리가 제은이에게 더 좋은 음식을 해 줄 수는 없을까? 왜 이모님 생각은 못했지? 처음부터 데이케어 안 보내고 이모님을 모셨으면 해결될 문제였을까?
그러고 보면 난 “이모님”이 바른 식생활을 잡아 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었다. 내 식성이 까탈스러워서 그랬는지 가정부 이모님들은 내 입맛에 맞는 것만 해 주셨다. 물론 몸에 안 좋은 달달한 식단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초딩입맛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주변 친구들을 보면 이모님을 모셔서 잘 된 경우도 많이 보고 있다.
9월부터는 프리스쿨을 보낼 예정이다. 그때부터는 프리스쿨에서 주는 급식을 먹을 것이다. 건강식이라고 주장하지만 크래커에 야채 조금에 과일 정도이다. 아니면 스파게티겠지... 미국 기준에서는 그 이상의 건강식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전까지 어떻게든 한국음식에 입맛을 들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한국행을 선택했다. 어쨌든 여전히 이모님을 안 모시고 아이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합리화가 되지는 않는다. 멘붕.
내 인생에 이불킥하며 밤새 후회한 적이 몇 번 있다. 처음 벤츠를 샀을 때 너무 비싸게 사서 밤새 후회하였고, 회사에서 중국인 가득한 팀에서 혼자 다양성을 외치며 거의 왕따를 당할 때에도 잠을 못 이루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이따금씩 이런 멍청한 결정들을 경솔하고 급하게 내린다. 내가 스타트업 사업을 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중 이번 결정은 내 인생에 내린 멍청한 결정들 중 최고의 꽃이 될 것이다. 1박 2일간 21시간 왕복 한국행. 그리고 제은이와 기약 없이 몇 달을 떨어져 있는다니.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내 멘붕을 감지하고 위로해 주면서 농을 건넸다.
“잘했다 븅신아.”
이 친구에게 이 말을 들은 적이 평생 몇 번 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었을 때의 결정들은 지금도 이불킥의 원인이 되며 나를 괴롭히고 있다. 벤츠를 샀던 것도 포함하여 고부갈등을 잘 대응하지 못해 괴로워할 때에도 그랬고... 나는 참 바보 같은 사람이다. 아니 븅신이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다. 물론 장애우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고 보통 우리말에서 저 말이 뜻하는 뉘앙스는 다 이해해 주실 것 같다. 븅신...
12시간의 비행 끝에 한국에 도착했다. 제은이는 마지막 두 시간 정도는 힘들어해서 투정도 많이 부렸지만 정말 잘 버텨주었다. 마지막 시간에는 신발을 신고 아장아장 앞장서서 비행기 이코노미 객실을 네 바퀴 정도 돌았다.
비행기도 조금 늦게 도착하고 짐 찾는 시간도 있고 해서 터미널에서 부모님을 만난 것은 이미 6시쯤 되어서였다. 한 시간 남짓 나와 우리 아이를 보기 위해 양가의 가족들이 다 나왔다. 너무너무 감사했고 반가웠다. 신혼부부인 동생 부부도 나와서 환영해 주고 많이 도와주었다. 그러고 보면 제은이에게도 동생을 낳아주어야 하나? 이렇게 제은이 하나도 제대로 못 보는데…
아직 잠에서 덜 깬 피곤한 제은이는 아빠에게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할머니도 작은 아빠도 다 어색해하고 아빠랑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울었다. 가족 모두 걱정이 태산이 되었다. 동생은 강아지를 떼어 놓아도 적응 기간을 갖는 법인데 이렇게 아이를 떼어 놓으면 어떡하냐고 걱정해 주었다. 맞는 말이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정말 븅신 같은 결정이었다. 나는 이 이벤트를 내 인생 가장 멍청한 실험으로 이름 붙였다. 모든 실험이 그렇듯 많은 교훈을 얻고 있다. 뼈저리게... 나는 가족이라는 것을 정말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우선 체크인부터 해야 했다. 장인 장모님이 준비해주신 김장 김치가 체크인 짐의 전부였다. 장모님의 김장 김치는 정말 맛있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일하며 사는 우리들 때문에 장모님의 김치 맛은 대가 끊기겠구나. 안 그래도 빨리 변하는 세상인데 미국까지 와버린 우리는 더 큰 변화와 단절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줄도 길지 않아서 체크인을 금방 마쳤다. 이제는 제은이를 보내줄 차례였다. 온 가족이 장인 장모님의 차를 향해 움직였다. 6:30 정도, 보딩이 7:50이었으니까 시간은 꽤 여유가 있었다.
다행히 두 달 전에 동생과 결혼해서 늘 들어도 어색한 ‘작은 엄마’가 된 제수씨가 애기와 잘 놀아주어서 제은이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아빠와 작은 엄마 손을 잡고 인천 공항의 드넓은 터미널을 달리기도 하고 손에 매달려 그네를 타기도 하였다.
기분이 좋아진 제은이는 차에 카시트를 설치하자 자기가 기어 올라가 앉아서 벨트를 매달라고 했다. 이런 착하고 똑똑한 딸이 또 있을까? 물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내 딸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다. 아빠한테 뽀뽀해달라고 했더니 평소에는 절대 안 해주던 뽀뽀를 해 주었다. 제은이는 자기 전에만 엄마 아빠에게 뽀뽀를 해 준다. 낮에는 절대 안 해준다. 그런데 지금은 해 주었다. 우리가 헤어지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걱정과는 달리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아빠가 밖에서 바이바이 하고 장모님과 장인어른과 함께 차가 떠나는데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내 사랑 유제은. 그 장면을 회상하니 눈물이 흐른다. 아빠가 무슨 짓을 한 거니...
주차장에서 제은이와 작별인사를 하고 터미널에 돌아오니 7시였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많은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제은이가 떠났다. 내 미션은 성공적이었다. 미션 자체가 븅신 같았던 것만 빼면. 다행히 제은이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울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너무 피곤해서 밥 먹고 목욕하고 푹 잤다고 한다. 가는 동안 미국 시간은 새벽 2시였는데 애기 엄마랑 화상통화를 했다고 한다.
처가 식구들을 보내고 우리 가족만 남았다. 내가 원래 속했던 가족. 8년간 미국에서 지내면서 자주 못 보고 지내지만 지금도 서로 사랑하고 함께하는 가족이다. 아빠가 되어서 느끼는 가족의 소중함은 정말 이전과는 너무 달랐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나를 안아줄 유일한 내편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해도 조용히 비난하기보다 걱정하며 이야기해주는 사람들. 내가 두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인천공항 터미널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낼 텐데 옆에서 따라다니면서 응원해주고 도와준 사람들. 가족. 내 가족이지만 내 가족이 아니게 되어버린 내 가족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오랜만에 한식을 먹었다.
가족과 30분간의 식사를 마치고 게이트를 향했다. 인천공항 제2터미널은 정말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답고 깨끗하게 잘 되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은 미국에서는 그나마 좋은 공항이지만 이렇게 친절하거나 사람들을 위해서 잘 정돈되어 있지 않다. 그냥 공무원들이 가득한 사무적인 건물을 지나는 기분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들이 너무 친절하다. 입국할 때 무작위로 하는 세관 검사에 걸렸었다. 안 그래도 짧은 시간 20여분을 세관 검사에 협조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앞에 아저씨는 얼굴이 벌게져서 새해부터 자신은 아무 세관 신고할 것도 없는데 시간을 낭비하게 한 것을 사과하라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여권 검사 대기 줄에서는 내가 잠시 안 움직였다고 나를 뒤에서 밀친 할아버지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연행되어 수감될만한 폭력적인 행동들이다. 미국에서 폭력적인 사람들은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힘을 이용해 공공의 안전을 지킨다. 일반인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하면 연행은 물론이고 바로 총을 맞을 수도 있다. 온갖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다양성의 사회인 미국을 전쟁터로 만들지 않는 것은 강력한 공권력의 힘이다. 친절한 경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서운 경찰만 존재한다.
정이 가득한 사회라고 했던 우리나라. 물론 옛날이야기이다. 정은 농경사회에서나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산업화 시대에 정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업무 태도로 돌아와 많은 비리와 정경유착을 낳았다. 그리고 지금은 정을 신봉하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고 한국사회에도 서로 간의 공간이 생기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정을 신봉하던 세대, 정을 이용하여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산업 발전에 이용했던 세대, 정을 믿지 않는 세대가 한 사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 세대 갈등을 보기보다 잘 봉합하고 성숙해지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미국은 이미 농경사회의 문화나 산업화 시대의 문화는 없어진 지 오래이다. 그런 사회도 문제가 참 많은데 한국은 세 시대의 문화가 함께 있는데도, 가끔씩 서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지만, 참 잘 발전하고 서로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해를 강요하는 문화도 있지만.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로, 실리콘밸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도착하고 다음날에는 새해 첫 출근이 기다리고 있다. 연말 셧다운으로 2주 정도를 쉰 이후인지라 회사 가고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작년 12월에는 일에 지쳐서 정말 힘들었는데 긴 휴식은 새로운 1년을 살아갈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었다.
비행기에서는 9시간 중에 6시간 이상을 잔 것 같다. 깨 있는 시간에는 스몰 풋이라는 영화도 보았다. 원래는 가족과 관련 영화를 보려다가 너무 울게 될 것 같아서 애니메이션을 틀었다. 가볍고 재밌고 생각할 것을 던져주는 영화였다. 제은이에 대한 생각에 갇혀 있던 나에게 생각의 전환의 기회가 되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그래 긴긴 인생 중 몇 달이야. 제은이 건강에 초석이 될 거야.’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려 아내에게 전화를 하였다. 비행기에 갇혀 피곤한 가운데 혼자서 자책하면서 비관하던 나와는 달리 집에서 혼자 꿀 같은 휴식을 취한 아내의 목소리는 밝았다. 어제 나보다 훨씬 심했던 자책감에서는 이제 벗어난 듯했다. 아내도 행복하고 아기도 행복했다. 장모님도 행복하고 어머니도 행복했다. 그러면 혹시 이 멍청한 실험의 끝은 해피엔딩인가?
아내는 자기 명의로 새로 리즈 한 작은 차 혼다 시빅을 몰고 나를 마중 나와 주었다. 어느새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커리어 우먼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어리게만 보았던 아내의 모습이 꽤나 다르게 보였다. 이번 주말에는 라스베가스로 출장도 간다. 유학생 아내로 시작한 아내는 참 많이 성장했고 멋진 사람이 되었고, 또 더 멋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이제 우리의 신혼이 다시 시작될 터였다. 오랜만에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이고 2년간 힘들었던 육아에 대한 휴식도 될 것이다. 같이 영화도 보고 좋은 식당에서 조용히 식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키도 타러 가고 유럽 여행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어떻게 보면 아이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내와 나만의 시간도 중요한 가족의 시간이다.
집에 도착하여 장모님이 싸주신 맛있는 배추김치, 파김치, 갓김치와 참치 캔을 하나 뜯어 밥을 세공기 정도 먹은 것 같다. 기내에서 자느라 한 끼를 걸러서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밥이 꿀맛이었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 몸이 슬슬 피로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3시 반쯤 잠들어 6시 반까지 잤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플레이스테이션을 켜서 그동안 못 했던 피파 19 게임을 세 시간 정도 한 것 같다. 지겨워질 때까지. 그동안 아내는 옆에서 면접 준비도 하고 회사 일도 하였다. 참 성실한 사람이다. 그동안 아이와 함께 하면서 저녁에 집에서 일까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훨씬 편안해 보였다.
아침이 되어 일어난 제은이와 화상통화도 하였다. 엄마 아빠를 찾지도 않고 너무나도 행복하게 잘 있었다. 제은이가 가장 신날 때 하는 뱅글뱅글 돌면서 춤을 추기도 하였고 장모님의 맛있는 집밥도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한다. 엄마 아빠는 잘 안 찾고 강아지 루루만 자꾸 찾았다. 그래도 잘 있으니 너무 다행이었다. 예쁜 우리 제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