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건 새벽이었다.
평소에 말이 없는 애다. 힘든 일은 꿀꺽 삼키는 스타일. 그 친구가 울었다. 전화기 너머로 목이 막혀 있었다. 사실은 이렇다고. 그래서 네게 돈을 빌렸노라고.
나는 그 남자를 모른다. 나에게는 내 친구가 소중하다. 그래서 차분하게, 하나씩 짚어줬다.
이 관계에는 이상한 구멍이 너무 많다고.
친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그가 보냈다는 몇 가지 흔적을 내게 전해주었다. 나는 그 조각들을 붙들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친구가 붙잡고 있던 사람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 사이에 너무 많은 틈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친구의 외줄 타기가 끝났다.
친구는 그를 모른다. 정확히는 그의 진짜 신분을 모른다. 그가 말해준 이름과 그가 말해준 생일만 믿었다.
사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지 않는가. 상대방이 “저 아무개입니다” 하고 악수를 청하면, 이 사람이 정말 아무개인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몇 번 가벼운 자리가 있었다. 단체 만남이었다. 그 얕은 자리에서 세심하게 내 친구를 챙기고 살뜰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는 꽤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친구의 다른 친구도 맞장구를 쳤던 거다. 둘이 잘 어울린다고.
그렇다면 친구는 누구를 사랑한 걸까.
사랑은 우습게도 혼자서 시작할 수 있다.
상대의 허락이 필요 없다. 계약서도 없다. 악수도 없다. 서명도 없다. 그냥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 그 사람 생각이 가장 먼저 난다. 그것으로 충분히 시작된다.
그리고 시작된 사랑은 상대를 멋있게 만든다. 작은 메시지에 의미를 붙이고, 늦은 답장에도 이유를 붙인다. 배경음악은 설레는 사랑 노래고, 세상이 잠깐 핑크가 된다.
문제는 누군가가 그 자리에 너무 쉽게 들어올 수 있다는 데 있다.
친구가 이미 절반쯤 완성해 놓은 그 사람의 자리에.
그가 어렵다고 했을 때 친구는 위로했다. 그가 흔들린다고 했을 때 친구는 밤을 새워 걱정을 했다. 그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친구는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끌어모았다. 그게 아니라는 신호가 어딘가에 있어도 볼 수가 없었다.
그건 어리석음이 아니다.
그게 사랑의 작동 방식이다.
사랑은 상대를 보는 게 아니다. 상대에게 투영한 자기 자신을 본다. 믿고 싶은 사람을, 믿고 싶은 방식으로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이 클수록, 무너질 때의 상처도 같이 커진다.
누군가가 친구를 흔든 게 아니다.
사랑이 먼저 시작했다.
나에게도 아픈 돈이다. 다만 그 돈이 당장 내 목을 죄여 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냥, 친구가 다시 웃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다.
나는 친구를 사랑하니까.
그보다 나는 친구가 다음에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지가 더 걱정이다. 누군가를 멋있다고 느끼고, 작은 메시지에 설레고, 세상이 잠깐 핑크가 되는 그 순간이—다시 올 수 있을지.
두 번 다시 그런 눈으로 사람을, 세상을 못 보게 되는 것. 그게 진짜 피해다.
그 친구는 누구를 사랑한 걸까.
실체보다 기대에 가까운 어떤 얼굴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진짜였다. 그 밤들은 진짜였다. 그 눈물도 진짜였다.
사랑은 상대가 완전할 때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그게 사랑의 가장 잔인한 점이다.
나는 오늘 새로운 문을 연다. 사랑에, 설렘에, 이유 없는 친절에, 나 자신에게 속지 않겠다. 지금은 그쪽에 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