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치료 끝에서, 나는 나를 마주했다.
10년의 우울증 치료. 살기 위해서 선택한 치료였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오히려 더 망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체념 속으로 들어가 혼자가 되었다. 깊고 어두운 곳에 앉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안심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덜 아프니까, 덜 흔들리니까.
우리 집에는 체중계가 없다. 나는 병원에서 ‘강제로’ 체중을 확인하는 삶을 살고 있다. 체중 정보는 외계어처럼 인식했다.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큰 실망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함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나는 그 숫자를 내 삶의 언어로 들이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들여오는 순간,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사람을 피하는 데에도 요령이 생겼다. 어쩌다 생긴 약속이 취소되면 그보다 기쁠 수 없었고, 성사될 뻔한 만남들은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 억지로 파투냈다. 불가피하게 지인들을 만나야 하는 자리에 나가면 구석을 파고들었다. 누구와도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의 변화는 지인들에게 놀라움과 가십거리가 되곤 했다. 밝은 사람이었던 나를 기억하는 지인들의 짓궂은 농담이 서슬 퍼런 칼이 되어 나를 찔러도, ‘밝았던’ 나는 웃고 있었다. 웃으며 버티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익숙한 깊고 어두운 곳으로 향했다. 더더욱 어둡게, 더더욱 깊이—침잠하고 싶었다.
사람이 많은 곳은 더 힘들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아서,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숨이 막혔고 심장은, 고장 나서 제멋대로 튀는 메트로놈처럼 달려갔다. 거대한 몸으로는 지하철이나 버스 좌석에 앉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꾸역꾸역 서 있으면, 타인의 시선이 억지로 걸쳐 입은 내 옷을 찢고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너의 숫자’는 비웃음을 사야 하고, 공격받아 마땅하다는 소리가—정말로 들리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더 조용한 길을 택했고, 더 좁은 공간으로 숨었고, 더 자주 “안 가도 되는 이유”를 만들었다.
옷장에는 입을 수 없는 작은 옷들만 가득하다. 나는 남성복에서 빅사이즈 트레이닝복을 살 수밖에 없었다. “난 원래 패션에 관심이 없잖아.”라는 말로 위안 삼으며, 옷을 그저 나체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하며 살아갔다. 단벌신사. 그랬다. 선택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생존이었다.
거울은 솔직하다. 그래서 애써 거울을 피해 다녔다. 그런데 운전 중에는 피할 수 없다. 룸미러 속의 나는 기억 속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낯설었다. 나를 보며 낯선 기분을 느끼다니. 퍼석한 생기 없는 피부, 자기주장을 잃어버린 것 같은 이목구비, 무채색으로 바랜 눈빛. 그 순간 생각했다. 이건 아니다. 아직…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
회사에서의 나는 기계였다. 마흔 중반, 16년 차 근속 직원은 어지간해서는 큰 실수나 큰 변수를 맞이하지 않는다. 새로운 일도 잘 일어나지 않는다. 늘 같은 종류의 질문들에 정확하게 대답하고, 정확한 메일을 발송하며, 누군가의 입맛에 딱 맞춘 보고서를 작성한다. 한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단단하게 성장한 ‘성공한 직장인’의 모습일까? 아니다. 나는 고인 물이다.
나는 회사에서 굉장히 친절하다. 친절함은 성격이기도 하지만, 방어이기도 하다. 하회탈 같은 가면을 써서, 엉망진창인 내 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거리감과 거부감을 어떻게든 상쇄시키려 노력한다. 웃는 얼굴을 고정하고, 안전한 말만 골라서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나는 회사에서 거의 초승달 눈웃음을 짓고 있다. 비어버린 동공을 들키지 않기 위한 선택이다. 그리고 어색한 상황에서는 일부러 크게 웃는다. 약해진 경계를 눈물이 뚫고 나오면 곤란하니까. 눈물은 한 번 시작되면,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휩쓸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피한다. 웃음으로, 말로, 일로—그 순간을 넘긴다.
그렇게 하루를 통과시키면, 나는 다시 깊고 어두운 곳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날 집에 돌아와 손을 내려다봤다. 반지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액세서리라 많이도 사 모았던 반지들이 서랍 속에서 색이 바래고 있었다. 마치 “기억 속의 나”가 거기 묻혀 있는 것 같았다. 룸미러 속 얼굴이 우연히 못난 순간이 아니라, 내가 모른 채 해 온 시간의 결과라는 걸—그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침 건강상의 이유로 몇 차례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권유받았던 위고비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이 선택을 멋있게 포장하고 싶진 않다. 어떤 날엔 절박했고, 어떤 날엔 창피했고, 어떤 날엔 그냥 너무 지쳤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더 이상 포기한 채로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다시 움직이기 위한 도구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었다.
모든 게 단번에 바뀌진 않을 것이다. 숫자는 천천히 움직일 수도 있고, 마음은 오래 흔들릴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내 몸을 다시 데려오고 싶다.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나는 오늘도 새로운 문을 열어, 더 이상 멀리서만 살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