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요청합니다.
학군이 좋다고 소문난 동네였다.
아파트가 빼곡했고, 엄마들은 희한하게 고등학교 동창 선후배로 다 엮여 있었다.
그들의 네트워크는 촘촘했다.
알고 싶지 않은 친구들의 성적과 관심도 없는 그들의 일상까지 공유되었다.
원하지 않아도 흘러들어왔다.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 집 이야기도 늘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는, 잘생겼다고 온 동네가 다 아는 아들이 있었다.
나는 심부름 가는 일이 은근히 기대됐다.
잘생긴 그 집 아들을 볼 수도 있잖아.
하지만 실제로 마주친 건 딱 한 번이었다.
문이 열렸고, 그가 서 있었고, 나는 잠깐 굳었다.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떠들어댔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주인공을 드디어 만났다고.
그 뒤로는 얼굴이 아니라 소식이 이어졌다.
대학을 했고, 군대를 갔고, 취직을 했다는 이야기.
장편드라마처럼 끊이지 않았다.
그 집 아줌마는 친엄마보다 더 엄마처럼 잔소리를 했다.
내 생애 첫 해외여행을 반대한 유일한 사람도 그 아줌마였다.
위험하다고.
나도 대학에 진학했다.
연애는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연애 시장에서 유리한 쪽은 아니었다.
짝사랑은 대부분 허탕이었다.
내 삶에 사랑 따위는 개가 물어가려고 사흘밤낮을 찾아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말라비틀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심장이 살아남느라 너무 바빠서, 사랑 같은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면 했다.
유명한 시트콤에서 시크한 변호사 주인공이 말하던 것처럼.
심장이 쇠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어쩐지 그 집 아들은, 내 자취집 밥상에 초대되었다.
사람이 온 게 아니라 소식이 왔다.
어찌 된 일인지 친오빠보다 그의 근황이 더 많이 들려왔다.
큰 시험을 마친 어느 날,
엄마는 그 엄마의 친구와 작전을 개시했다.
축하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고 했다.
그 자리에 그 아들이 나왔다.
아, 이 자리.
결혼 쪽이구나.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전날 회식의 여파로 정신이 없었다.
식사 내내 그는 마치 여기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괜한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1년 반을 따라다녔다.
구애는 하지 않았다.
계속 나타났다.
그리고 결혼을 요청했다.
그것도 매우 성실하게, 근성 있게.
거창한 프러포즈는 없었다.
결혼도 내가 물고 늘어져서 겨우 했다.
아마 백 번은 넘게 결혼하자고 했을 것이다.
내가 올린 품의서는 전결. 결재완료다.
결혼은 그렇게 진행됐다.
준비된 행사는 잡음 없이 흘러간다.
우리 결혼도 그랬다.
그리고 그 행사는 지금까지, 잡음 없이 운영 중이다.
나는 오늘 새로운 문을 열어, 안 하는 쪽의 반대편, 하는 쪽에 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