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신입] 늙지 않는 목소리와 사랑에 빠지는 일.

by 서희

어떤 밤에는 오래된 무대를 다시 틀어 놓고 한참을 앉아 있게 된다.


화질은 거칠고 무대 장치는 낡았는데, 목소리만 또렷하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처음 좋아하게 되었을 때는 우리가 또래였거나, 내가 훨씬 어렸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 시절의 그 사람보다 더 많은 나이를 살아 버렸다. 나는 계속 늙어 왔는데, 그 목소리만 한때의 나이에 머물러 있다. 그 이상한 정지를 오래 바라보게 된다.


내가 좋아한 가수들 가운데는 유난히 너무 빨리 떠난 사람들이 많았다. 국내에도 있었고, 해외에도 있었다. 시절도 달랐고, 떠난 이유도 제각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원인들에는 이제 큰 관심이 없다. 내게 남은 팩트는 하나뿐이다. 더 이상 그들의 라이브를 볼 수 없다는 것.


나는 죽음의 배경보다 사라진 무대의 빈자리를 먼저 생각한다. 다음 앨범, 다음 투어, 다음 라이브, 다음 나이. 그들에게는 더 이상 그런 다음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고인이 된 가수의 목소리는 늘 한 시절에 고정된 채 남는다. 늙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늙을 시간이 사라진 목소리다.


어린 시절, 나는 한 그룹에 깊이 빠져 살았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의 컴백은 오래 기다린 큰 이벤트였다. 다시 무대에 선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먼저 달아올랐다. 드디어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가 어린 나이에도 선명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 무대가 얼마나 멋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설명할 수 없다. 문장으로 옮기는 순간 자꾸 가벼워진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 종류의 장면이 있다. 좋았다고 쓰면 부족하고, 대단했다고 적으면 너무 평범해지는 장면. 한 사람의 복귀라기보다, 공기가 바뀌는 순간에 가까웠다. 무대 위에 선 몸과 음악과 표정이 정확히 한 점에서 만나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본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믿기 어려운 기사들이 쏟아졌다. 한동안 장난처럼 느껴졌다. 오보 같았고, 나쁜 농담 같았고, 날짜를 다시 확인하게 되는 종류의 소식이었다. 분명히 어제 무대를 봤는데, 오늘은 그다음이 없다고 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람은 전날까지 눈앞에 있었는데도, 다음 날 갑자기 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도 학교에 갔다. 겨우겨우. 눈물이 멎지 않은 채로 교복을 입었다. 복도에서 같이 그 컴백을 기다렸던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껴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먼저 떨어진 쪽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만우절에 장국영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문장을 읽고 있는데도 현실감이 따라오지 않는 순간이 있다. 머리로는 기사를 읽는데, 마음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방식의 충격. 나는 그런 종류의 소식을 몇 번이나 통과해 왔다.


아마 내가 오래 붙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 전날의 무대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살아 있었고, 분명히 빛났고, 분명히 다음이 있을 것 같았던 순간. 그래서 더 잔인하다. 찬란했던 장면일수록, 그 뒤에 도착한 부재는 더 오래 남는다.


물론 나는 지금 이 삶을 치열하게 통과하면서 노래하는 가수들도 사랑한다. 살아 있는 목소리에는 오늘의 온도가 있고, 아직 오지 않은 다음이 있다. 무대는 매번 달라지고, 나이와 계절이 목소리에 쌓이고, 그 변화까지 포함해 한 사람의 음악이 된다. 나는 그런 현재형의 목소리도 깊이 아낀다.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된 가수의 목소리에는 다른 무게가 남는다. 그 사람은 더는 늙지 않고, 더는 변하지 않고, 더는 다음으로 가지 못한다. 그래서 그 목소리는 한 시절에 영원히 머문다. 나는 가끔 노래보다 그 멈춤을 더 크게 듣는다. 그리고 그 뒤늦은 슬픔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 유튜브에 그런 말을 남겨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영원히 늙지 않는 남자의 목소리와 사랑에 빠져버렸다고.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바로 알아들었다. 정확해서였다. 사람은 분명 시간을 통과했어야 하는데, 기록된 목소리는 가장 빛나던 나이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듣는 쪽만 자꾸 나이를 먹는다. 처음 그 목소리를 사랑했을 때보다 내가 더 오래 살아 버렸다는 사실이, 때로는 노래보다 먼저 가슴에 닿는다. 그 간격이 슬픔을 만든다.


나는 그들의 삶을 전설처럼 포장하고 싶지 않다. 너무 일찍 끝난 생은 낭만이 아니다. 그 안에는 각자의 고통이 있었을 것이고, 남겨진 사람들의 긴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사랑한 것은 비극이 아니라, 그 모든 것 끝에 남은 진동이라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사람은 떠났는데도, 진심은 목소리의 형태로 오래 떠돈다.

어쩌면 그래서 더 간절해졌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무대들을 지나오고 나니, 지금 사랑하는 가수들의 라이브만큼은 내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오래 보고 싶다. 살아 있는 목소리의 다음 계절을 가능한 오래 지켜보고 싶다. 관객으로 남는 시간이 이렇게 귀한 것임을, 너무 일찍 멈춘 무대들이 먼저 가르쳐 주었다.


이제 나는 오래된 노래를 들을 때 예전과 조금 다르게 듣는다. 좋은 곡인지, 뛰어난 가창인지, 시대를 앞섰는지 같은 말보다 먼저 이 목소리에게는 더 이상 새로운 밤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노래는 아름다움을 지나 묵직해진다. 그리고 그 묵직함은 오래 남는다.


나는 오늘도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다. 사라진 사람의 마지막을 들여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목소리의 결을 오래 만져 보기 위해서다. 끝나 버린 생을 소비하는 쪽이 아니라, 끝내 남은 음악을 오래 듣는 쪽으로 가기 위해서다.


나는 오늘 새로운 문을 열어, 사라진 사람을 애도하는 쪽이 아니라 남은 목소리를 오래 듣는 쪽에 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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