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시간에 새로운 생각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이 들떠 있고, 건조하고 딱딱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나의 일상에 매우 진심이고, 그렇기에 생각보다 더 애쓰며 살고 눈치채지 못하게 사랑을 갈구하며 산다. 누군가를 책임지려는 마음에 익숙하다 보니 차갑게 보인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은 여리디 여리고 마음을 잘 내어주기도 한다. 잔잔한 마음을 변덕스럽게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큰 결심과 가치관이 흔들리는 법은 없었다. 나의 마음을 변덕스럽게 느끼는 타인이 있다면 그건 나의 마음이 타인으로 향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일단 관계가 시작되면 믿고 가는 타입이기 때문에 믿지 못할 국면에 접어들면 마음을 많이 다치곤 한다. 이쯤 되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만남의 기간과 상관없이 이별과 이별과 비슷한 국면은 늘 아프다.
그런 나에게 대표로서 산다는 것은 수많은 종류의 이별과 가까이하는 일임을 알게 된다. 직원으로 살아간다는 건 "이직"과 "이직하는 사람들"사이의 이별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작과 끝이 있는 프로젝트에서 만나는 사람들, 기간이 정해져 있는 인턴쉽, 퇴사로 인한 통보 이별, 이해를 따지는 파트너십과 파트너사이의 결별에 각종 모임, 새로운 친구들과 만남과 이별까지.
대표로 살아간 지 7년 차다. 마흔의 문턱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어떤 이별이든 어떤 이유든 아프다. 현실적으로 만남보다 이별하는 방법에 더욱 능해져야 다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이별들.
이성들과의 이별의 경우 이별을 예감했고 통보했다. 관계는 시작되었으나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감정을 견디지 못했다. 사랑하지 않는데 이어지는 관계 앞에서는 자포자기했다. 주로 상대방으로부터 시작된 감정이 동력이 되긴 했지만 찬찬히 마음을 깊게 주곤 했다. 그렇지만 어떤 한계 앞에서 관계를 포기했다. 그래도 여기까진 그냥 아프기만 했다.
예감하지 못하는 이별은 일상을 송두리째 다시 생각하도록 했다. 요양원에 계시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죽음. 치매에 걸리셨던 할머니를 갑자기 보내드리게 되었다. 그동안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다. 예감을 예감한 것도 나고 이별을 이야기한 것도 나였기에 더 아플 수 있는 헤어짐의 강도를 희석시켰을 수도 있었겠다. 살아서 좋아하는 사람과의 이야기에서 죽음이라는 예고 없는 이별로 시선이 넓어졌다.
조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이별 - 적어도 인사 정책에 의한 상담, 주변인들의 이야기들, 퇴사 절차가 있기 때문에 갑자기 퇴사를 선언해도 준비할 시간이 있는 이별이었다. 이해관계로 이루어진 관계였기 때문에 조금 더 손해 보는 느낌으로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작은 조직의 특성상 대기업과 다른 이런저런 이유로 함께 일해왔기 때문에 조금 더 정에 이끌려 이별을 해석하게 되긴 했다. 하지만 이별 후유증은 그저 혼자만 아는 비밀에 부쳤다.
잠수 이별은 여전히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다. 참 가볍다. 만남이 가볍고, 약속이 가볍고, 서로가 나눈 대화가 깃털처럼 가볍다. 아무리 무겁고 진중한 사람이더라도 어떤 사회적이거나 시스템적 속성에 들어가면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다. 당신이 좋아요. 당신은 내게 호감이에요. 라고 먼저 다가오고, 가볍게 떠나간다.
공적 영역도 사적 영역에서도 잠수 이별이 많아지고 있다. 아닌 채 했지만 나 조차도 가볍고 쉽게 혹은 회피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상처받고 있었다. 비즈니스로 맺는 인연은 잠수 이별이라 하더라도 주고받을 게 명확하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부침이 덜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무력감은 마음을 어쩌지 못하게 만드는 잠수 이별로부터 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을 살아가는 나는 잠수 이별에 익숙해져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모든 이별에 있어서 나 만큼은 잠수 이별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아닐까. 아름다운 이별은 없지만 이별을 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어른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
세상과 이별하기 전 모든 이별이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이별한 사람이 아니라 이별한 장면이 이별한 대상의 마지막 모습이 - 그 이별을 대했던 나의 마음이 기억되지 않을까. 크고 작은 시간을 함께했고, 시간 사이로 어색한 침묵도 흘려보냈고, 영혼이 공명하기도 했다. 꺌꺌 웃기고 상대를 걱정했다.
인생의 단면을 나누었던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그 가치를 적어도 나 만큼은 잊지 않고 싶다.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잠수 이별 앞에서도 덜 상처받겠다.
*** 글쓰기하고 나니 조금은 가벼워졌다. 브런치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여전히 타인을 위한 글이 아닌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글을 쓴다. 내가 브런치 구독자수에 연연하지 않는 이유다. 언젠가 나를 넘어서 타인을 위한 글을 쓰게 되는 단단한 날이 오길 ... 그 때까지 하루하루 잘 살아내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