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라는 독에 스스로를 가둔다. 나의 슬픔엔 길이 나 있다.그 길의 시작점엔 사람이 있고, 끝엔 시대가 있다.
이 길을 깨닫게 된 건 스스로에 대한 엄청난 발견이었다. 우주에 같은 사람은 없다지만, 이러한 발견으로 인해 나는 스스로에 대한 인식, 타인을 보는 관점, 세상을 대하는 태도 등이 이전과 달라지기도 했고 확고해지기도 했다.
#사람
특정인을 미워하는 건 여러모로 적성에 맞지 않다. 그 사람의 개성, 특성, 스타일을 존중한다. 존중하고, 존중한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환경과 배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에 종국엔 미워할 수가 없다. 그 나름의 내러티브가 있는 존재에 대한 예의다. 그런데 이러한 포용력이 예의와 상식이라는 틀과 부딪히면 가차 없어진다. 존중은 하지만 존경하기는 힘들고, 관계의 바운드리에는 두지만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대
나는 어리숙하고 어리석다. 시대를 이해하는 힘이 약하다. 그런데 시대와의 연결감은 크니 대략 난감한 상황이다. 나혜석 님의 글을 읽으며 1800년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면서도 옆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시대의 표면화하지 않지만 모두 알고 있는 어두운면을 경험하면 미치게 힘들다. '내 일도 아니면서' 옆집으로 전이되었다가 결국 시대로 간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어느 정도 미쳐서 사는 게 방법이에요." 요새 나한테 미쳐가는 시대에 대해 가장 많이 알려주는 네일아트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이 분 앞에선 늘 작아진다. 내가 일에 몰입하는 이유는 어딘가 불편하고 모호한 시대의 단면과 이성의 작용을 넘어서 편승하거나 편승하려는 마음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탈피
그동안 무지하게 잘도 살아왔다. 그건 나의 의도도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나쁜 거, 어두운 거, 상처 날 것 같은 것들로부터 도망치듯 살아왔다. 아름다운 것, 예쁜 것,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분위기를 쫓았다. 그런데 결국 나의 인생은 밝은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해석의 기제들을 동원하여 매양 의미를 찾아왔기에 개인적인 시련을 잘 극복하고 씩씩했다. 다만, 시대적 아픔과 어떤 포인트들이 연결되면 헤어 나오기가 힘들다. 갑질, 소수, 글레스 월, 인권, 젠더 바이어스,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결혼 제도... 수도 없다. 그런데 오늘로써 이러한 슬픔에 지기로 결심한다. 탈피할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시대유감으로부터 탈피를 선언한다.
#설명
약하고 부족한 점도 많은 나에게 세상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개인의 시련을 극복한 것처럼 시대의 아픔을 느끼는 너 자신에게 용기를 주라고. 시대를 유감하기도 하고, 흑화 된 시대를 경험하고 시대를 제대로 느끼고 지기도 하라고. 종국엔 조금은 밝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존재가 되라고. 그것이야 말로 스스로가 풀어야 할 숙제들이라고. 발견하고 인식할수록 스스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데 가치를 두라고. 언제나 마음은 손바닥 뒤집듯. 슬픔에서 발견으로, 세상과 시대를 알아가는 카테고리의 새로운 생성. 이렇게 슬픔의 길에서 경로를 바꾼다. 내 슬픔의 근원을 설명하는 힘을 길러야 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