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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상 Sep 21. 2024

#1.내 친구, 장학수

‘번쩍’
 노인은 눈을 떴다. 그의 눈앞은 온통 새하얗다. 하지만 그 하얀 빛은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강렬하지 않았고, 은은하면서도 그의 눈을 오히려 편하게 해주었다. 노인은 자신이 누운 채로 눈을 떴다는 사실을 금 깨달았지만 언제부터 그곳에 그렇게 누워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지?’
 속으로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 손바닥으로 땅바닥에 대었다. 몸이 기억하는 듯 평상시 버릇처럼 그는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그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다. 그는 가볍게 손바닥으로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신기한 듯 손바닥을 펴서 들여다보았다. 구리빛의 주름이 쭈글쭈글한 영락없는 나이가 많은 노인의 손바닥이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손바닥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처음 눈을 뜬 그대로 주변은 온통 하얗기만 하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노인은 자신의 첫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는 질문보다 이곳은 어디이고,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잘 있었는가?”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교복을 입은 한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그는 키가 대략 170cm 정도 되어 보였다. 노인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위아래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곱슬머리에 얼굴에는 여드름들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의 두 눈과 다시 마주치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잘 있었냐니깐?”
 “아..아니..”
 노인은 말문이 턱 막혔다. 나이만 하더라도 그보다 6~7배는 많아 보이는 그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반말을 내뱉는 모습에 기가 차서였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이 육시럴 놈이 어따 대고 반말..”
 “머리에 피가 마르면 죽는대?”
 교복을 입은 남자는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너무도 당차 보이는 그의 모습에 노인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어휴. 그 욱하는 성질머리는 여전하구나. 하하하”
 교복을 입은 소년은 마치 노인을 오래 전부터 안다는 듯 너스레 웃으며 얘기했다.
 “이.. 이 녀석이!!”
 노인은 그런 소년의 말에 더욱 화가 나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때 그 소년은 손을 쭉 뻗어 노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머리 속에서 뭔가 번갯불이 번쩍이듯 무언가를 비추는 것 같았다.
 “자… 장학수??”
 노인의 입술에서 마치 안에서 새어나오듯 이름이 튀어나왔다.
 소년은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잘 맞추었다는 듯 씨익 미소를 보였다. 입가가 올라가며 그의 볼에 듬성듬성 난 여드름이 함께 실룩거렸다.
 장학수…
 장학수는 그의 학창 시절 절친이었다. 이상하게도 노인은 그 이전의 기억은 없으나 장학수라는 친구를 만난 그 첫날부터 기억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손이 닿는 것이 마치 컴퓨터에 USB를 꽂아 기억이라는 데이터를 옮기듯 그에 대한 기억이 처음부터 물밀듯이 그의 머리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장학수 이야기]
 장학수를 처음 만나던 날은 추운 겨울 어느 날이었다. 학수는 문방구 앞에 앉아 홀로 신이 나도록 게임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땅에 쪼그리고 앉아 할 수 있는 덩치가 조금 작은 오락실용 게임기가 문방구에 한두 개씩 놓여 있었다. 그나마 신경을 쓰는 문방구는 게임을 (그나마) 편안히 할 수 있도록 간이 의자를 가져다 놓은 곳도 더러 있었다.
 장학수를 첫 대면한 기억이 확실히 기억나는 건 좀 특별했기 때문이다. 그 게임기는 대부분 주로 초등학교 중에서도 저학년 대의 아이들이 주로 모여서 하던 건데, 그에 비해 덩치가 조금 큰 아이가 그것도 날씨가 추운 날 홀로 앉아서 게임에 집중하던 모습이 그에게는 너무도 인상 깊었다. 아니면 당시 아버지의 회사 발령으로 갑작스럽게 이사를 간 그에게는 그렇게 홀로 있던 학수의 모습이 왠지 모를 동질감으로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스윽. 게임에 몰입하고 있던 학수에게 다가갔다. 그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슬쩍 눈알을 굴려 반사된 화면을 통해 그림자를 보는 듯하였다. 그가 하던 게임은 일대일로 격투를 하는 게임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해왔는지 현란한 손놀림과 함께 기술을 선보였다. 어느덧 그의 기술이 들어가는 게임을 보자니 노인 역시 함께 손에 땀을 쥐며 속으로 응원을 하고 있었다. 학수는 그의 오른 발을 쓱 내밀어 옆에 비어 있는 간이 의자를 살짝 밀었다.
 옆에 앉아 같이 하자는 신호였다. 그렇게 그들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첫 만남이 게임기 앞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첫 이미지는 달리 장학수는 공부를 꽤 잘하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이후 전체 인원 중 상위 10명까지 등수와 이름을 커다란 대자보에 적어서 학생들이 자주 지나가는 1층 중앙 계단 옆 벽에 붙여 놓았다.
 전교 3등…
 “우와. 학수 너 엄청나다?”
 “에이. 암것도 아니여~ 암튼 이따 학교 마치고, 백화점에 가는 거 잊지 않았지?”
 학수는 멋은 듯 얼른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 덤덤한 그의 태도가 그는 마음에 들었다. 잘난 척하지 않고, 그를 있는 그대로 동등하게 바라봐주는 그 느낌.


 그날은 학교를 마치고 학수와 백화점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학수가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당시 학교는 남녀 공학이었으나 남녀 반은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CA라는 클럽 활동을 통해서 남녀 합반의 경험을 일주일에 딱 한 번 누릴 수가 있었고, 그렇게 게임을 사랑하던 학수는 본인이 눈여겨보았던 다른 반의 여자애가 영화 동아리에 가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며 같이 등록한 것이다.
 “정말이지. 눈이 너무 예쁜 것 같아.”
 바로 눈앞에 그녀가 있는 듯 학수는 말하곤 하였다. 그가 말하는 그녀의 이름은 김미정이라는 여자아이였다. 귀 밑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단발머리에 그가 말한 것처럼 눈이 크고 초롱초롱 빛났다. 그녀 역시 공부를 꽤 하는 편이라—역시 끼리끼리 끌리나 보다. 대자보에 전교 1등에 당당히 이름이 적혀 있었다.
 늘 멀리서만 맴돌며 그녀를 바라보는 학수남자는 답답하였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하는 거여. 넌 게임은 그렇게 화려한 기술을 써가면서 잘하는데 왜 이렇게 연애는 잼병이냐?”

“내가 잘 해서라기보다 네 욱하는 성질머리 때문에 그런 거지 크크”
 “뭐야? 나 또 욱한다!”
 남자는 오른 팔로 그의 목을 감싸 누르며 왼쪽 손으로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자, 연애는 이 형만 믿고 따라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100% 성공이다!”
 “진짜지? 좋아. 이번에 성공하면 내가 게임 한 수 물러주마.”
 학수도 그의 말에 든든한 듯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1월의 바람은 차가웠다. 그날은 눈까지 내리며 온통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백화점은 버스 정류소에서 내려 바로 큰 길 건너에 있었다. 추운 겨울 미정에게 줄 따뜻한 목도리를 선물로 주자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다.
 “딱 보니 미정이 목도리가 좀 오래된 것 같더라고.”
 “이야. 넌 또 그런 걸 어떻게 캐치했냐?”
 “임마~ 그러니깐 나만 믿으라고. 연애 순위로 대자보에 붙었으면 내가 1등으로 붙였을 거라니깐! 하하하”
 남자의 너스레가 싫지 않은 듯 학수는 방긋 웃는다.
 백화점 입구에 들어서자 많은 인파들이 북적거렸다. 그들의 키보다 약 2배는 큰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여러 화장품 냄새가 뒤섞여 그들의 코를 간지럽혔다. 그들은 놀이동산에 온 듯 조금 더 빠른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지난 주에 엄마랑 백화점에 왔다가 목도리를 세일하는 걸 봤어. 브랜드도 메트로 거인데 완전 싸게 팔더라고.”
 남자는 학수에게 설명을 늘어놓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앞서 나갔다. 많은 인파들로 인해 혹시나 코너가 조기 마감이 되었을지도 모를 불안감에서였다. 하지만 이윽고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오! 찾았다. 아직 하네 흐흐. 얼른 가보자.”
 게임을 할 때 말이 많던 학수는 얌전한 양이 되어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봐봐. 있지? 미정이가 한 목도리가 핑크였었는데 흠.”
 “흰색…”
 학수는 진열된 여러 목도리 중 고민도 없이 흰색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굵은 털실로 동그란 문양으로 짜여진 목도리였다. 아무런 글자나 그림 없이 깔끔해 보였다.
 “응?”
 “미정이는 흰색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그의 수줍은 말에 남자는 웃었다.
 “자식~!! 언제 또 그런 걸 알았냐?”
 “아니. 길가다 몇 번 사복 입은 걸 봤는데 흰색 옷을 즐겨 입는 것 같더라고.”
 “이 자식~ 아닌 척 하면서 엄청 분석했구먼. 크크 그래. 네 본능에 맡겨보자. 어차피 내가 생각하기에도 여자들은 밝은 색의 심플한 걸 좋아하더라고.”
 그렇게 크 고민 없이 그들은 목도리를 골랐다.
 백화점을 나섰다. 남자는 신이 나듯 말을 계속 이었다.
 “이제 다음 단계는 말이지. 고백을 해야 하는데, 이게 분위기가 중요해.”
 학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듯 목도리가 든 쇼핑백을 양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큰 길 횡단보도 앞에 섰다. 남자는 자신의 말에 심취한 듯 학수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단 말이지. 내가 볼 땐 말이야.”
 “그르게. 나도 그게 참 고민이 되긴 해. 확실히 미정이 걔는 남들 앞에서 고백받는 걸 좋아하지는 않을 듯해.”
 횡단보도 불이 파랗게 바뀌었다. 그와 학수는 발을 내딛어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때 그 순간 거센 바람과 뜨거운 뭔가가 남자의 얼굴을 덮쳤다.
 “응?”
 남자는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잠시 멍하니 있던 그는 옆에 학수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 학수?”
 그때 횡단보도에 서 있던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반걸음 좀 더 빨랐던 학수는 어느새 몇십 미터 밖으로 널부러져 있었고, 커다란 2.5톤 트럭이 노인 앞에 서 있었다. 그제서야 남자의 얼굴을 덮친 게 단순한 바람뿐 아니라 학수의 피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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