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인이 영어로 쓴 우리나라 이야기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이제야 읽었다. 소문보다 훨씬 더 감동 백배의 눈물겨운 한국적 스토리다. 김주혜 작가가 9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힘든 이주민 생활을 하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작품이라 감동이 더 했다. 더구나 김주혜 작가는 당시 이민 온 다른 한국인들과는 다르게 영어 이름을 만들지 않고 ‘주혜’라는 한국이름을 계속 사용했으며 집에서는 늘 한국어를 사용했는데 그 배경에는 작가의 외할아버지가 김구 선생을 도운 독립투사였던 가족사가 있었다고 한다. 독립투사의 외손녀가 미국에서 성장하면서도 여전히 한국적 소재인 호랑이를 가슴이 품고 있다가 오랜 시간만에 조상들의 꿈을 대신 피워내듯 만들어낸 작품이기에 우리처럼 해외교민들에게는 한 번쯤 읽어봐야 하는 소설인 것 같다.
소설은 1918년부터 1964년까지 48년의 세월을 담고 있다. <작은 땅의 야수들>이라는 책 제목은 소설 속 어느 일본인의 대사 속에 등장하는 단어인데 표면적으로는 호랑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한국처럼 작은 땅에 어떻게 호랑이처럼 웅장한 야수가 살고 있느냐는 대사 속 표현이었지만 사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패배가 자명하던 일제강점기의 시련 속에서도 수천, 수만 가지 모습으로 끝없이 저항하던 우리 선조들을 빗대어 한 표현이라는 것을 소설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책 속에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서로 나란히 걷기도 하고 엇갈려 비껴가기도 하고 서로 대치하기도 하지만 모두 저마다의 색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기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은 당장이라도 책 속에서 튀어나와 말을 걸 것만 같이 현실적이고 입체적이다. 영웅처럼 보이지만 비겁한 모습이 비치고, 악질적인 인물 안에 나약함이 숨어있다. 정말 저주스러울 정도로 못된 인물이 순수한 연민의 감정을 내보이며 뜻밖의 도움을 줄 때는 당황스럽다. 멸시받는 기생이지만 예인으로서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일본인의 수발을 들면서도 뒤로 독립군을 돕기도 한다. 인력거를 몰던 가난한 소년이 자신을 뒷바라지했던 옛 연인을 버리고 더 배경 좋은 재력가의 사위가 되어 우리나라 최고의 사업가가 되는 모습이나 한 때 경성 최고의 가수였던 여배우가 마약중독자로 사창가를 떠도는 모습에는 전쟁 폐허에서 빠르게 산업화를 이루며 숨 가쁘게 성장했던 우리의 지난 세월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책에서 가장 뜨거운 장면을 꼽자면 경성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순간이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맨 몸으로 비폭력 저항을 하는 우리 선조들의 모습에서 숨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다. 이 장면이 영문으로 쓰여 전 세계인에게 읽힌다는 것은 굉장히 뜻깊은 일이다. 실제로 작품의 이 장면 대해 질문하는 외국인과의 인터뷰에서 김주혜 작가는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받아 매우 기쁘다며 살짝 울먹인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도 생각나고 소설 <파친코>도 생각나는 이 책은 위 드라마와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더 재밌고 감명 깊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뜨겁게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낸 우리 선조들 덕분에 비교적 넉넉하고 여유 있게 이민 생활을 하고 있는 하노이의 한국 교민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