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
한인회도서실 신간목록에서 '그래픽 노블'을 만나면 꼭 읽어보는 편이다. '그래픽 노블'은 일종의 만화책인데 코믹물 만화책하고는 다르게 보다 철학적이고 진지한 내용을 삽화로 표현한 책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유익하기도 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골라 읽는다. 그렇지만 이번에 읽은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은 다른 '그래픽 노블'과는 다르게 읽기가 무척 어려웠다. 20세기 시작할 당시 서구 유럽의 철학가와 사상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겨우 읽을 수 있을 책인데 나한테는 그런 배경지식도 없었고 삽화의 도움이 있더라도 내용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전쟁과 학살이 손쉽게 자행되던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던 지식인들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고민이 많았는지는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20세기 초 여성 사상가로서 아주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악의 평범성>이라든가 <인간의 조건>등 단어 몇 개 정도로만 조금 알고 있던 아렌트라는 인물을 이번에 이 책을 통해 자세히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아렌트가 어린 시절부터 말년까지 일생을 ‘세 번의 탈출’이라는 키워드로 단락을 나누고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나간 책이다.
첫 번째 탈출
아렌트는 대학시절 자신을 지도하던 교수이자 유부남이었던 하이데거와 사랑에 빠지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하이데거는 당대 아주 유명한 철학 교수였는데 제자이면서 유대인이었던 아렌트와 연애를 하고 나중에는 나치에 부역하기도 했던 이중적인 인물이다. 실존 철학계의 대부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제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훗날 사상적인 배반도 했다니 모순과 혼란이 가득한 당시 시대와 어쩌면 어울리는 것 같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결국 끝내고 친구인 슈테른과 결혼을 한다. 그리고 점점 나치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는 독일에서 벗어나 프랑스로 망명을 떠난다. 이것이 아렌트의 첫 번째 탈출이다.
두 번째 탈출
두 번째 탈출은 슈테른과 이혼하고 블뤼허와 결혼을 하면서 시작된다. 또한 지역적으로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간다. 프랑스를 벗어나는 과정은 말 그대로 영화를 방불케 한다. 당시 나치 독일이 뻗치는 검은 그림자를 피해 수용소에 갇히기도 하고 그 수용소에서 빠져나와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 은둔하기도 하며 극적으로 경찰의 눈을 피해 위험한 순간을 모면하기도 하면서 어렵게 미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세 번째 탈출
세 번째 탈출은 정체성의 변화, 사상적 성장을 표현한 것이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여러 나라를 거쳐 아슬아슬하게 도망쳐 다니던 아렌트가 이제는 1,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얼룩진 20세기,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고발하는 사상가로 입장을 바꾼 것이다. 세상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라는 개인이 저지른 일이라 하지만 아렌트는 모두가 다 함께 만들어 낸 비극이라고 설파한다. 세상은 진실을 외치는 그녀를 두려워하며 미워한다. 또 남성들은 자신보다 더 용감한 그녀를 갈망하며 저주한다. 여성들 또한 당당하나 도발적인 그녀를 동경하며 질투한다. 아렌트는 찬사와 혐오를 동시에 받으나 그 어떤 평가에도 개의치 않는 자유인으로 살아간다.
이 책은 만화로 표현되어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나한테는 아주 많이 어렵고 복잡한 책이었다. 너무 많은 인물과 너무 많은 사건들이 얽혀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전쟁과 학살로 범벅이 된 끔찍한 시대를 통과하며 끊임없이 성찰하고 질문하는 아렌트의 격동적인 삶에 대해서 한 조각 정도 알게 되었고 당시 복잡했던 사상가들의 삶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