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는 키가 크고 잘 생기시고, 어린 내가 보기에 시골 할아버지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밥을 먹을 때 늘 술과 함께였다.
“할아버지, 왜 밥을 술 하고 먹어요?”
“술은 쓰고, 밥은 달아서 궁합이 잘 맞지”
어른들은 그것을 반주라고 불렀다. 내가 아는 반주는 노래할 때 풍금을 치는 것이었는데, 술도 반주라고 하다니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술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우리 집에는 술병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두꺼비가 그려진 이홉들이 술병을 주로 애용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만 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아빠도 술을 좋아했다. 우리 아빠는 말이 없고 순한 사람이다.동네 사람들은 그런 아빠를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그런 아빠는 술을 먹는 날이면 엄마랑 큰 소리가 났고, 어린 나는 술이 싫었다. 난 술을 먹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내 나이는 10살이었다.
술은 쓴 맛만 있는 게 아니로구나
우리 집에는 술도 많았다.
인삼주랑 앵두, 뽕, 사과, 약초 같은 것이 들어있는 유리병들이 줄지어 벽장에 있었다.아주 어릴 때는 어떤 병에 뱀도 들어있어서 기겁을 하고 울었던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벽장에 들어갔다가 술병 속에 술은 없고 인삼만 남아있는 병이 있었다. 인삼은 몸에 좋은 것이라 하니 한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에 뿌리 하나를 집어 들고 씹어보니 달콤하기도 하고 쌉싸름하며 뭔가가 입안에 확~ 퍼졌다.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작은 뿌리를 하나 먹고, 큰 뿌리를 먹고, 또 하나를 집어 들고 우적우적 먹다가 그냥 잠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술맛을 알아버렸다. 술은 쓴 것이 아니구나.
술은 조절해야 하는 것인데...
성적에 맞추고, 집에서도 가깝고, 등록금도 싸고, 마침 운이 좋아 장학금도 받게 되어서시내에 있는 국립대 농대로 진학했다. 대학교에 가면 ‘사랑이 꽃피는 나무’나 ‘마지막 승부’에서 보았던 멋있는 오빠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옴마야! 그곳엔 그냥 아저씨들만 있었다. 그런 아저씨 같은 선배들과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난 신이 났다.
“아하~ 술은 사람을 신나게 만들어주는 것이구나!”
내가 술을 먹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먹었다. 그렇게 우리 엄마는 어린 지지배가 술을 마시고 업혀 들어오는 나에게 큰 실망을 했다.
아이러니
나는 술을 잘 마시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열 살 때 술을 안 마시는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던 꼬마는 대학 때 함께 술 마시고 놀던 선배와 결혼까지 했다. 우리 엄마는 아빠가 술을 마시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여전히 술이 집에 떨어지지 않게 해 놓는다.
누군가는 술을 백해무익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술에 인생을 저당 잡혀 제대로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또 누군가에게는 술이 인생에 위로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한다. 같은 술인데도, 어떤 날은 얼굴이 찌푸리질 정도로 쓰고, 어떤 날은 달아서 술술 먹게 되는 날도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스위스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술과 관련된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보면 술이라는 건 어쩌면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술이란 인생이다.
내 기분에 따라, 내 상태에 따라 술의 종류도, 맛도, 잔도, 양도 달라진다.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것처럼, 술은 내가 조절하는 것에 따라 친구가 되기도 하고, 내 인생을 망치는 독배가 될 수도 있다. 그 열쇠는 술을 마시는 내가 가지고 있다.
체구가 작은 나는 어느 순간 술이 확 취해 버린다. 다행스럽고 감사하게도 함께 하는 이들이 좋은 사람들이라 술 마시고 취해서 까부는 나를 잘 챙겨주어 난 아무 탈없이 지금까지 지내왔다. 나는 술맛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가끔은 친구들과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