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함과 보편성에 대한 고민을 처음 한 것은 대학입시를 앞두고서 였다. 국립대를 가기 원하시는 부모님과 달리 어정쩡하게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이 막연히 좋아하는 농구팀이 있던 인 서울 대학에 가고 싶었다.하지만 서울로 갈 성적은 되지 않았고 나는 청주와 대전에 있는 국립대두 곳에 원서를 넣었고 둘 중에 한 곳을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때 가장 고민한 것이 유일함과 보편성이었다.
유일함이 장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당시 국내 유일의 아니 아시아에 유일하다는 학과를 선택했다. 담배와 인삼을 전공으로 하는 학과.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담배산업은 인간과 밀접한 물건이기에 계속 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니러니 하게도 몸에 해로운 대표적인 담배와 보양식품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인삼을 전공으로 하는 농대에 있는 학과였다. 내가 졸업 후 어떤 진로를 결정할지에 대한 뚜렷한 고민도 없이 그저 유일함이 무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다른 과와 마찬가지로 선배들은이나 동기들은 전공을 살려 관련 업종으로 공부를 하고 취업도 하고, 어떤 선배는 아예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로 나아가기도 했고, 공무원을 준비하는 선배도 여럿이었다. 유일함이 무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공기업 또한 공채로 가야 하는 시험 통과이기에 학과의 유일함이 크게 플러스로 작용하지는 않아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운이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빨리 취직하고 싶다는 급한 마음에 졸업도 하기 전 서울에서 금연 담배를 기획하던 제약회사 연구소(보조연구원으로) 몇 개월 일을 하다가 서울 생활을 접고, 경기도에 있는 종묘회사 연구소로 이직했다. 첫 회사는 전공을 살려 일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이직회사는 종묘회사였지만 내게 주어진 업무는 분자생물학 분야였다. 나는 기초부터 하나하나 배워야 했기에 면접관이던 팀장님께 나를 뽑은 이유를 당돌하게 물어보았다. 팀장님은 백지에 그림을 그리기가 쉽듯, 전공자가 아닌 나를 가르치면 훨씬 빠르게 습득하고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3년 정도 열심히 공부하며 일을 했다. 팀장님께 많은 신뢰와 인정도 받았지만 답답한 시골생활을 벗어나고 석박사 연구원들 속에서 자격지심을 느꼈기에대학원을 핑계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고민했다. 대학원은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
대학 전공을 이어서? 분자생물학 분야? 친구가 권유한 약학대학 대학원?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친구가 조교로 있던 약학대학원이었다. 약학대학원을 졸업하면 집 근처 제약회사나 식품회사의 연구원으로 보편적인 취업이 유용하리라 생각했다.다행히 보편적인 공부는 이력서를 넣기가 훨씬 다양했고, 또 두어 번 짧은 이력을 건너고 운이 좋게 대학원 전공을 이을 수 있는 연구소에서 일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현재의 나는 또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유일함을 무기로 대학 전공 분야에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유일함이 무기가 되고 싶었다면 나는 그쪽 분야에서 더 오랫동안 일을 하고 견뎌야 했다. 성질이 급한 나는 빨리 뭔가를 이루어내고 싶은 마음에 한 분야에서 진득하니 오래 있지 못했다. 더 괜찮아 보이는 곳을 찾아 옮겨 다녔고 결국 계속 처음처럼 제자리였다.그때는 고작 서른도 안된 나이에 뭘 그리 빨리 가고 싶었을까.
결국 가장 오랫동안 있던 회사는 종묘회사였고 이전, 이후 한 달 혹은 몇 달을 다닌 곳도 있었고, 잦은 이직이 창피해서 이력서에 적지 못한 곳도 있다. 내가 고작 두 달을 다녔던벤처회사는 몇 년 뒤 대박이 나는 것을 보며 땅을 치며 후회하기도 했다.그래도 객관적으로 보이기에는 좋은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도 자기소개서에 마치 뼈를 묻을 것 같았던 다짐은 헛말이 되어버렸다. 출산과 건강상의 이유로 긴 휴식기에 들어갔다. 경력단절...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
그때 알았다. 유일함도 보편성도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무기라는 것은 결국 인내심이 되어야 함을. 어떤 일이든,어떤 곳에서든 힘든 과정, 하기 싫은 고비를 넘기는 힘이 가장 큰 무기임을. 어릴 적의 나는 그 고비를 넘기기가 너무 싫었고, 내 길은 좀 더 쉽고 편한 길이 될 줄 알았다. 편한 길을 찾고 싶었다. 빨리 좋은 열매를 얻고 싶었다. 하지만 편한 길도, 빨리 얻을 좋은 열매도 없었다.
편한 길이란 결국내가 오랫동안 갈고닦아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좋은 열매도 자라고 익을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좋은 무기는 유일함 속에서도 보편성 속에서도 시간을 갖고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더 나은 내가 되고 상담자가 되기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좋은 무기가 무엇일까 여전히 고민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