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내가 열심히 해 왔던 일과 사람에 대한 허무함, 가사에 대한 스트레스로 가까이에 있는 남편이 꼴 비기 싫고, 혼자 짜증이 나서 툴툴거렸던 적이 있다. 하지만남편의 좋지 않은 면을 더 많이 보며 마음이 불편했던 건 나였다. 그러다 나의 감정이 풀리니 또 다른면이 보였다.
아침 딸아이를 급히 데려다주고 오며 현관에 놓인 남편 슬리퍼가 보인다. 하루에도 몇 번씩현관을 들락날락했는데,그날은 마치 매직아이처럼 남편의 낡은 슬리퍼만 눈에 훅 올라왔다.
십오년은 된 듯....버렸다.
아... 대체이걸 몇년을 신은 것인가.한 십오 년은되었던가... 결혼후 얼마 안 지나 대형마트에서 이만 얼마를 주고 산 기억이 난다. 물론 슬리퍼를 신고 가는 곳은 집앞 편의점이나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정도의 용도이지만 그래도 이상태가 되도록사달라는 말이나 불평도 없이 지냈던 것인가...순간 왈칵 눈물이 올라왔다.
남편은자신의 물건을 잘 사지 않는다. 내가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사주면 크게 불만 없이 그냥저냥 소비하는 사람이다. 아주 가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 기분이 좋지 않은 시기에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은 그저 나의 귓등으로 가볍게 흘려진다. 그러면 본인이 필요한 뭔가를 사지만, 산 이후에는 늘 나의 한소리를 들어야 했다.
"뭐 어디서 그런걸 산거야? 색도 이상하고, 불편해 보이고,,,"
등등 그 물건에 대한 품평을 해 댔다.
내 물건을 사는 데에는 게으름이 없었다. 유일하게 나의 불만 욕구를 푸는 것이 좋아하는 물건 한두 개를 사는 일이었다. 그런 나를 위안하며 소비에 대한 죄책감을 당위성으로 바꾸었다.
'난 술을 아주아주 가끔 마시니까, 난 친구도 한달에 한번 만나니까 이 정도는 나를 위해 사도 되는 거지..."
그래서 신발장에도 옷걸이에도 죄다 내 물건이다. 다행스럽고 감사하게도 남편은 그런 나의 소비에 잔소리나 지적을 하지 않았다. 10여 년쯤 전에 농담조로 십만 원 이상 되는 물건을 구입할 때에는 사전 결제를 받으라 했지만, 한번도 남편에게 사전 결제를 하지 않았다. 십만 원이 넘는 물건일지라도 구만 오천 원이라 이야기를 하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바닥 밑창이 다 낡고 고무가 헤지도록 슬리퍼를 신으며 불만도 없었던 남편에게 미안함이 커졌다. 욕구불만인 어린애처럼 나는 내가 갖고 싶은 것만 보이고 내 것만 사는 철없는 아내가된 기분이었다.나는 당장 그 낡은 슬리퍼를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나이키 신상 슬리퍼를 주문했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없을까만은... 자신의 욕심을 조절하는 사람은 있다.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남편은 자신의 기준 양 이상을 먹지 않는 사람이다. 반면 나는 외식을 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면 그 한계치를 넘기고 후회를 한다.그는 감정의 동요도 크게 없는 사람이지만, 나는 감정의 동요가 크고 감성적이다.이런 다른 부분을 서로 맞춰가기도 하고, 이런 다른 부분으로 인해 종종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8월 31일로 사직서가 수리된 남편은 20여 일 동안 늦잠도 자고, 살림도 조금 하고, 친구 만나 놀고, 넷플릭스도 실컷 보더니 오늘 홀로 제주도로 떠났다. 막상 남편이 보름이나 없을 생각을 하니 빨래도 개야 하고, 쓰레기도 버려야 하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져 많이 아쉽다.
충분히 휴식하고 충전하고 돌아와 다시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갈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비싸지도 않은 그의 낡은 슬리퍼처럼 그는 묵묵히, 책임감 있고, 또 성실하게 자신을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다채롭고 컬러풀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아내와는 달리, 무채색처럼 묵직하지만 믿음직스럽게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