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영 Sep 28. 2021

pieces

분명히 존재함을 믿는 것


며칠 내내 바람 좋고 하늘은 푸르고 마냥 좋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슬플 때도 있었지만 날씨가 좋으니 괜찮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구름이 제대로 끼고 바람이 조금 분 오늘 학교 도서관에 가는 길에 아이스 카페라테를 시켜서 걸어가는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흐린 날씨에 아이스 라테를 마시니 프레스턴이 생각났고 딱 작년 이맘 때에 내가 영국에 도착한 것이 생각났다.


학교 캠퍼스와 공원에서 프란이랑 같이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마셨던 수많은 순간들과 혼자서 카페에서 비오는 날 마셨던 커피들과 그 구석 자리가 생각났다. 프레스턴을 떠나기 전까지도 약간은 어색해했던 카페 직원과의 인사와 짧은 잡담들도.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고 수업을 들으며 잠깐잠깐 떠오르는 그 순간들이 재밌었다. 처음에는. 근데 점점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조금은 슬퍼지는 것 같다. 날씨의 힘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작년 이맘 때 느꼈던 살짝 쌀쌀한 초가을 기운과 흐린 날씨가 내 안에 뭔가를 건드린 것 같다.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계속해서 영국에서 내 9개월간의 생활이 어떤 의미로 남을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지 못한채로 최대한 여기에서의 삶에 집중하려 했다. 근데 이제는 안다. 어떤 기억에 대한 정리된 의미 같은 건 없다는 걸. 매 순간 순간이 제각각 살아나서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매번 내가 언젠가 영국에서 친구를 사귀고 걸어다니고 말을 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왔다는 걸 기억할 것이다.


그 시간들이 아주 그립다. 그때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다 꿈같다.


청계천을 걸었을 때에는 프레스턴의 캐널에 죽 줄지어 있는 집들과 선배드 같은 의자에 앉아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 났고 집앞 중랑천을 걸으면서는 운하를 지나가려다가 길 한대목을 막고서 앉아있는 백조 때문에 못지나가서 친구랑 깔깔 대고 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았던, 혹은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던 아주 아주 작은 순간들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들이 다 나한테 돌아오고 있다. 그 시간들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걸 나보고 좀 알아달라는 것처럼.


그러니까 나는 나를 더 믿어줘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장자리에 선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