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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영 May 13. 2021

가장자리에 선 것들

셔터를 누르며 받는 것들과 흘려보내는 것들


사진 암실 수업을 마친 4월의 어느 오후였다.


한창 사진 과제를 어떻게 해야 잘 풀어나갈지, 어떤 느낌으로 찍힌 사진이 나와 맞는 사진인지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건강한 고민이 아니라 집착과 불안의 형태가 되었다.


그날도 다를 바 없이 머릿 속 생각으로 가득 찼던 날이었다. 캄캄한 암실에서 나와 햇빛을 보는데 날씨가 참 좋았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 영국 프레스턴에서는 보기 드문 날이다. 구름이 아주 보기 좋게 깔려있고 바람은 시원하고 달큰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든 두발로 걸어서 이 생각들을 다 두고 와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캠퍼스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항구에 갔다. 가는 길에 항상 눈으로만 봐왔던 이탈리안 피자 가게에 들러서 마르게리따 피자 한판을 포장해서 들고 갔다. 이상하게도 피자 한판을 들고 가니 외롭지 않았다. 고작 먹을 것 하나에 외로움이 덜어진다는 게 웃기고도 슬펐다.



사실 항구에 가기까지 짧은 순간에 많은 고민을 했다. 예전에도 몇 번 갔던 똑같은 항구인데 오늘 간다고 과연 좋을까. 똑같고 지겨운 풍경만 보고서 후회하지는 않을까 하고 그날의 내 미래를 예상해보았다. 이건 내가 갖고 있는 안 좋은 사고방식 중 하나인데, 무언가를 직접 하기 전까지 그것을 하고 나면 어떨지,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지 안될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입으로 내뱉으면 말이 안 되는 고민이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직접 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음에도 근거 없는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이 날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일단 가서 걷자. 가서 걸어보고 별로면 그때 집에 오면 된다.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다음에는 바로 발걸음에만 의식을 두고 항구로 걸어갔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걸어가니 항구에서 본 풍경이 별로 좋지 않더라도 기분이 괜찮을 것 같았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거리들을 지나 마주한 항구는 눈부시게 빛났고 바람은 기분 좋게 피부를 스쳤다. 오후의 해는 정오의 햇빛보다 더 부드러웠고 노을이 지기 전의 해보다 더 힘이 있었다. 나는 항상 앉았던 벤치에 앉으려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을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 다른 벤치에 앉아보았다.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항구의 모습은 또 달랐다.


벤치에 앉아 부드럽고도 힘이 담긴 햇빛을 쬐며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봄과 여름 사이의 열기와 바람으로 부드럽게 풀어진 구름이 보였고 자글자글한 보석들이 빛을 받아 빛나는듯한 강물이 보였다. 나는 그것들을 보며 나 스스로를 다시 믿을 수 있었다.


충분히 앉아서 햇빛을 느끼고 나니 팔의 피부가 적당히 달아올라 달큰한 기분이 들었고 오늘 밤엔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배낭을 다시 메고서 이번에는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해가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고 그에 따라 강물 위의 윤슬도 조금씩 바뀌었다. 나는 그것들을 담고 싶었다. 아무 목적도 바람도 없이 그것들에 가닿고 싶어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필름 카메라로는 약 3년간 사진을 찍었으니 지금 내가 찍는 것들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무용한 행위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용한 사진들을 내가 그만 찍고 싶을 때까지 찍고 싶었다. 나중에 필름을 찾았을 때 실망할까 봐 두려운 마음 따위는 나에게 조금의 영향도 주지 않았다.


타원형의 산책로를 반복해서 걷고 또 걸으며 강물을 계속 쳐다보았다. 예쁘게, 아주 예쁘게 빛나는 그것들을 보면서 어떤 보석을 주어도 이것들과 바꾸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박완서 작가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잘 써지기라도 하면 그 기쁨은 여왕과 팔자를 바꿔준다 해도 안 바꿀 것같이 행복하다 했던 것처럼.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에 찍었던 사진들을 들여다본다. 원래는 한국에 돌아가서 필름을 맡기려 했지만 내가 이전에 소중히 보았던 것들을 봐야지만 지금의 내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핸드폰에 담긴 사진들을 보며 나는 이런 사진들을 또 찍을 수 있는 날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날의 내가 지녔던 생기와 회복과 입체감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항상 봐왔던 것들로부터 어떻게든 새로움을 찾아내고 싶어서 걸어갔으나 내 자신도 내 주위의 환경도 그 어느 것도 주눅 들게 하지 않고 그저 그대로 눈을 맞추고 돌아온 4월의 어느 날이었다.





가장자리에 선 것들

Clinging on to the 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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