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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베이킹랩 이성규 Mar 23. 2020

빵 수업 전 달콤 쌉쌀함 30분

에스프레소 한잔의 기억

빵 수업 전 30분은 달콤했다. 온전한 나만을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수업은 9시에 시작되었다. 집에서 양평에 있는 빵 공방까지 60킬로, 출근길 차로 가득한 올릭픽대로를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가야 하는 먼 길이었다. 길 막히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기에 출근길 교통체증이 시작되기 전 집을 나섰다.


양평 가는 길 내내 한강이 함께 했다. 올림픽대로를 따라가는 동안에는 왼쪽으로, 팔당대교를 넘어서면 오른쪽으로 한강이 따라 달렸다. 차창을 내리고 달리는 차 안으로 시원한 한강이 들이쳤다. 직장생활로부터의 해방감이 더해져 시원함은 배가 되었다.


당시 내비게이션에 설정된 목적지는 두물머리였다. 두물머리로 들어가는 사거리가 가까워지면 작은 고민이 시작된다. 두물머리로 가서 산책을 할까, 아니면 저 앞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잔 할까.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진 날은 두물머리로 향했다. 코가 찡할 정도로 추운 겨울날 아침 두물머리는 낭만적이었다. 멀리 펼쳐진 수면은 산과 만났고 햇살을 받은 수면 위로는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아무 상념 없이 멍 때리기 좋은 순간이었다.


두물머리가 미세먼지로 덮인 날에는 카페로 향했다. 이런 청정지역까지 점령한 미세먼지를 원망하면서. 청년이 운영하는 카페는 아침 8시에 문을 열었다. 나는 매번 이 카페의 첫 손님이었다. 거리 방향으로 난 창을 바라보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계산대로 가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한다. 청년은 설탕 한 봉지와 함께 에스프레소를 내게 가져다주었다. 봉지를 뜯어 사라락 설탕을 붓는다. 한 모금을 마신다. 쌉쌀한 맛이 한차례 입안을 훑고 지나간 후 새콤함이 감돈다. 새콤함을 음미하며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책장을 몇 장 넘긴 후 잔을 입으로 가져가 고개를 뒤로 젖힌다. 남아 있는 커피 한 모금과 함께 커피에 녹아 시럽이 된 설탕과 녹지 않은 설탕이 입안으로 천천히 흘러 들어온다. 입 안은 다시 한번 쌉쌀함으로 가득 차고 뒤이어 달콤함이 번진다.


나는 서른이 넘도록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대학생 때 처음 맛 본 커피는 쓰기만 했고 한 모금을 마셨음에도 머리가 핑 돌았다. 카페인에 민감했던 것이다. 그 첫 한 모금으로 나는 커피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못 마실 음료!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커피에 대한 나의 정의가 바뀐 계기가 있었다. 회사 교육차 머물토리노의 어떤 식당에서였다. 오전 교육이 끝나고 이탈리아 자회사의 교육 담당자는 우리를 회사 근처 식당으로 데려갔다. 근처에 있는 회사 직원들이 와서 먹는 외부 구내식당정도 되는 이었다. 어떤 음식이 있었고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커피에 대한 기억만은 생생하다. 현지 직원은 식후에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바리스타가 뽑아 조그만 잔에 담아주는 에스프레소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설탕 봉지를 쫙 어 설탕 한 봉을 촤라락 쏟아붓고는 바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오물오물한 후 커피를 넘기고서는 엄지를 척 들었다. 얼굴 가득한 미소는 '이게 사는 맛이지'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딱 한 모금 분량의 커피는 멋진 향을 풍겼고 표면은 진한 황금색의 크레마로 덮여 있었다. 봉지를 뜯어 설탕을 한봉 붓고 바로 원샷. 캬~~~ 스타벅스 창업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는 하워드 슐츠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나에게 커피는 에스프레소였다. 설탕 한 봉을 털어 넣은 에스프레소.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과거를 기억다. 당시의 한 장면일 수도, 배경에 흐르던 음악일 수도, 먹은 음식일 수도 있다. 반년 동안 다닌 양평의 빵 수업, 난 수업 시작 30분 전 마시던 에스프레소 한 잔의 달콤 쌉쌀함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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