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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달래 Jun 04. 2020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날


1. 내 오른손 중지와 약지에는 뿌리 깊은 굳은살이 있다. 대한민국의 혹독한 초중고를 지나온 이라면 누구나 있을 굳은살이지만 내 손에 있는 것들은 아주 단단하고 크다. 중지는 힘이 센 굳은살에 밀려 손톱이 삐뚤어졌으며 어릴 적 연필 잡는 습관을 잘못 들인 탓에 남들은 굳은살이 박일 일이 없는 약지에까지 굳은살이 있으니 그 면적 또한 넓다. 대학교 때까지는 못생긴 내 오른손이 미웠다. 뭘 그렇게나 끄적였을까, 나는 뭘 그렇게나 끄적이고 싶었을까.


 조금 어른이 된 나는 못생긴 내 오른손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자랑하기도 한다. 손가락이 이렇게 될 만큼 열심히 공부하고 글을 썼다고. 어렸을 때부터 산문을 쓰며 훈련한 결과라고. 울퉁불퉁한 박지성의 평발과 굳은살로 뒤덮여 비틀린 강수진의 발만 큼은 아닐지라도 나도 나름 사랑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들인 증거가 여기 있노라고. 아파하고 미워하고 사랑한 시간들을 지나 오늘의 나는 좋아하는 시와 글을 한 시간이 넘게 필사할 수 있는 강인한 손가락과 손목을 가지게 되었다. 고통과 인내의 보상은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2. 사고 싶은 책이 10권 넘게 밀려있을 때 가장 먼저 피프티피플을 사기로 결심한 건 작가의 말을 보고서였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서 높은 빌딩에 가거나, 꽉 막히는 도로를 보거나, 카페에서 창밖을 볼 때면 자주 궁금해했다. 저 사람들은 다 뭐 하는 사람들일까, 여긴 왜 왔을까, 오늘 뭘 했을까. 그런 나에게 조각 수가 많은 퍼즐을 맞추다 결국 마지막에 자리를 찾기 힘든 희미한 하늘색 조각을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사람 한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은 너무 매혹적이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뿐이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이들이 존재하고 그 사람들의 생이 모이면 결국 모두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내 인생에선 조연이고 엑스트라 일지라도 그의 인생에선 아주 치열하게 하루를 견뎌내고 있을 세상의 주인공들. 카페를 향해 걷는 동안 지나친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어쩌면 과거에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이들, 어쩌면 훗날 마주칠지도 모르는 이들. 세상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잡아매는 것은 무심히 스치는 사람들을 잇는 느슨하고 투명한 망이라는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으로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고 믿는 주인공이기에.




3. 오늘 필사한 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기형도의 미발표 연시와 연예인 홍진경이 쓴 글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런 시를 써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나는 잘 늙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뒤섞여 마음이 시끄럽다. 수고스러운 젊음, 정갈하게 늙는 일... 이런 단어들이 어렵고 무겁다. 내가 노인이 될 때까지 이 세상에 남아있기는 할까. 매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늙는 일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4. 요즘 시간이 가는 게 아깝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아하는 글을 쓰는 것. 이런 풍족한 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아 자꾸만 더 느끼려 더 즐기려 욕심을 부리게 된다. 과유불급인 것을. 내게 주어진 것만이라도 잘 쓰고 잘 보내자고 나를 달랜다.


2020.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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