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기형도
오늘은 내내 배가 불렀다. 배가 고픈 순간은 눈을 뜨고 출근하기까지 약 한 시간에 불과했다. 먹고 또 먹고. 눈앞에 라면이 보이면 물을 끓이고 과자가 있으면 입에 넣고 텀블러가 가벼워지면 커피를 채우고.
덜 생각하고 덜 우울하고 조금 더 잘 수 있게 된 28살의 나는 단순해졌다. 먹고 싶으면 먹자, 내가 좋으면 된 거야.
단순해진 28살의 나는 문득 어떤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는.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있는 그대여
떠오르는 장면은 너무 많이 생각하고 쉽게 우울해지고 불면증에 밤새 뒤척이던, 괴롭다 생각했던 시간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생각하지 않아 즐거운 바보와 어디로 가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괴로운 존재.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아직은 완전히 바보가 되지 못했다. 즐거운 바보도, 괴로운 존재도 되지 못한 체 어중간하게 중간 어디쯤 걸쳐 있는 나는 무엇도 아니다.
오후 6시, 해질녘은 나를 무엇이든 되고 싶게 만든다. 홀로 빨갛게 밑줄 그어진 '혼자였다'. 그 네 글자가 외롭다. 빨갛게 밑줄 그어졌다고 무조건 틀린 건 아니다. 혼자인 게 틀린 건 아니다. 어중간하게 혼자 서 있는 나 역시.
2019.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