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말없이 뒤돌아선 채
담배만 물고 계셨다.
그날 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 것은
어머니의 눈물이나 낯선 환경이 아닌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1999년 3월.
훈련소에 들어가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 느낀 아버지의 여린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태어날 때부터 가난과 함께 한 아버지는
4남매의 장남이라는 이유로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당연했던 시절이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분이셨다.
다행히, 시대의 강요가 있었다 해도
아버지는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하셨다.
그랬기에 어린 시절 시골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온갖 일들을 하며
실패와 성공을 반복한 이야기는
아버지의 강인한 모습을 더욱
선명히 만들어 주었다.
내가 성인이 되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때,
아버지는 잘 나가던 사업을 정리하셨다.
사업의 확장을 위해 더 큰 투자도 고민했기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정이었다.
아쉬움은 분명 남았겠지만,
충분한 성공과 하실 만큼 하셨기에
누구도 그 결정에 대해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뒤.
어느 날, 아버지는 그때의 결정에 대해 지나가듯
이야기했다.
"다시 한번 사업이 무너지면 이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더라."
아버지가 성취한 성공은 그 크기와 상관없이
실패의 트라우마를 지워주지 못했다.
수 십 번의 실패로 아버지가 깨달은 것은
한순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단순한 가르침은 수 십 년이 지나고,
튼튼한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는 순간에도
불쑥 고개를 치켜들 만큼
어찌하지 못하는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려고 할 때면
여지없이 위기가 닥쳤다고 한다.
그런 불운들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때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잃으셨다.
쌀 한 가마니 판 돈을 손에 쥐고
고향을 떠났던 청년은
4살 된 딸과 갓 태어난 아들을 둔
가장이 되었을 때, 말 그대로
빈털터리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고 하셨다.
제대 후 유학을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아버지는 크게 반대하셨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저 안정되고,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도전과 실패를 반복한 아버지는
역설적으로 그와 같은 인생을
물려주고 가르쳐주길 싫어하셨다.
아버지에게 도전은,
항상 실패를 달고 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일 뿐이었다.
군대라고 하는 족쇄가 사라지자마자
나는 유학을 떠났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반드시
유학을 가게끔 만들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명확한 이유가 존재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20대의 나에게는 커다랗고 중요했을 그것이
지금 나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면
인생에서 그리 중요한 가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것을 미리 알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칭찬에 인색하셨다.
잘했다고 칭찬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부족한 것만 지적하셨다.
결과가 크고 좋을수록
아버지의 지적은 냉정했다.
억지스러울 만큼 높은 그 기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는,
숨이 턱 하니 막히곤 했다.
그 마음을 눈치채실 때에도
아버지는 언제나 같은 말을 건넬 뿐이었다.
"더 잘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겨우 지킬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잃고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크게 실패한 순간.
아버지는 시골로 돌아가려고 하셨다.
너무 부끄럽고 싫었지만 그것 말고는
도무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하셨다.
그 마음에 매일같이 무너질 때,
걱정되어 집으로 방문하신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모두가 알만한 고생이었고 노력이었기에
손안에 쥐어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그 현실이
너무 억울했다고 하셨다.
한시도 쉬지 않고 일했던 아들이
눈물만 흘리는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왜 이룬 게 없냐.
며느리와 손주, 손녀까지 나한테 안겨주었는데..."
두 아이의 가장이었지만, 할아버지에겐
20대 후반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그 아들이 타지에서 고생하며
가장이 되고 무너지는 그 모습에
할아버지는 자책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다시 시작할 마음을 얻었다고 했다.
학생 때부터 직장 생활까지
남에게 크게 아쉬운 입장이 된 적이 없었다.
스스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고,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자존심 강한 만큼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했지만,
내 길이 아니라면 미련 없이 쌓아 올린 것들을
버릴 수도 있었다.
노력한 만큼 평가받기를 원했고,
그 평가만큼 나의 자리를 만들어갔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원칙이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했고, 간결했다.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라 생각했다.
나는 결혼을 하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 놓인 꽃들이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의 취향도 함께 깃든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성공 위에 얹어지는 여유로움 대신
칭찬에 인색하고 엄격한 아버지에게
꽃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히려
나의 성격이 투영된 선입견일 뿐이었다.
그제야 아버지 회사 곳곳에 심어진
꽃들의 존재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꽃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아들이 군대에 간다고 뒤돌아선
어쩌면 누구보다 여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여린 마음으로
인생에서 꽃을 만끽할 시간도 아까워하며,
결과에 만족하면 손에 쥔 것도 지킬 수 없다고
자신을 채찍질하셨을 것이다.
그 채찍질 뒤로 거친 잡초를 뽑아내며
크고 넓은 울타리를 쳐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세워둔 울타리 안에서
세상 물정 모르던 아들이
먼 이국땅으로 나갔을 땐, 어쩌면
또 한 번 경험하기 싫은 실패의 트라우마가
고개를 치켜세웠을지 모른다.
어설퍼 보였을 것이고, 불안해 보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매일을 가슴 졸였을 것이다.
명절을 맞아 방문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에서
절을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떠날 때쯤.
아버지가 불쑥 이야기하셨다.
"다음에 나도 할아버지랑 할머니 산소가 있는
여기로 와야 하지 않겠나."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계시는 곳보다
위의 자리로 갈 수는 없으니 그보다는
낮은 자리로 가야 하지 않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무심히 내뱉으시는 그 말에 당황한 나는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멀뚱히 아버지가 가리키는 자리만 바라봤다.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시간에서
아버지가 계실 자리를 마주한 것은.
불안한 도전보다 안정된 삶을 원했던 아버지는
불행한 시절과 불운한 시대에 떠밀려
고향을 떠나셨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후 아버지가 깨달은 건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단순한 사실을 얻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겪어야 했다.
그 실패를 이겨낸 것이 책임감 때문이었는지,
강한 의지 때문이었는지, 혹은
오기였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내 자식들만큼은 본인이 겪은 걸
물려주지 않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돌고 돌아 아들은 컸고,
할아버지가 그러하셨듯,
아버지에게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와 손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커가고 있다.
20대의 아버지가 경험한 실패의 반도 겪지 못한 나는 40대 중반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살아가는 나만의 세상에서 작동하던
단순하고 간결한 그 세상의 원칙은,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까지 지켜낸 자존심은
아버지의 실패로 쌓아 올린 울타리 덕분이었음을
깨닫는다.
아니, 오래전에 이미 깨달았다.
다만, 부족함 없이 누리고 있는
이 일상의 행복 뒤,
어느 날 마주해야 할 삶의 또 다른 몫을
아버지는 다시 깨닫게 해 주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막지 못할 그 시간에
혹여나 아버지가 없이 감내해야 하는 그 몫을,
당신의 아들이 스스로가 잘 받아들일 수 있길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버지의 시간이 줄어들고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어른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