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무르익지 못한 설렘
라마는 라즈니쉬 아쉬람에서 한동안 매일 울고 웃고 춤추며 소리 질렀다. 이것은 라즈니쉬 아쉬람의 독특한 명상법 중 하나였다. 이제껏 노래도 없었던 라마의 인생에서, 이 모든 것이 너무 낯설고 어색해서 춤은 고사하고 누가 수갑이라도 채운 듯 처음엔 팔도 제대로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라마의 심경에 그간 삶을 너무 억압했던 자신의 모습이 재차 투영되었다.
사실 그날 라마는 이런 어색함을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라마는 어제의 그 어색함이 사실은 두려움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걸 안 이상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라마는 짐짓 용기를 내서 일어나 일부러 팔을 휘젓고 소리 질렀다. 순식간에 어색함의 탈을 쓴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랬다. 두려움은 라마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었다.
내면의 감시자가 사라지자 라마는 자발성을 회복해갔다. 삶의 흐름이 바뀌었고 수행의 관점도 달라졌다. 엄격함과 심각함으로 점철되었던 지난날들이 느슨함과 즐거움으로 빠르게 대체되어갔다. 겨울 벌판 같던 라마의 마음에 바야흐로 봄꽃이 피어올랐다.
라즈니쉬 아쉬람에는 서양인 구도자들이 많았다. 더불어 한국인이나 일본인으로 보이는 동양인 구도자들과 인도인 구도자들이 뒤섞여 국제 공동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엔 많은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마는 이곳의 자유분방함이 좋았다. 이곳의 구도자들은 수행을 빙자해 짐짓 굳은 표정으로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연스럽게 웃으며 눈인사를 나눴고, 약간의 안면이라도 있다 치면 남녀노소 불문 스스럼없이 포옹을 나누었다.
라마도 이젠 여성을 보고 시선을 피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여자든 남자든 아쉬람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두루두루 편안하게 인사하고 대화도 나누었다. 소규모의 명상 모임에 참여하면서, 그 모임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과는 포옹할 정도의 친밀함도 나누었다.
물론 서양인 구도자들 입장에서는 그들 문화의 일부이기도 하기에, 이성 간에도 이런 식의 인사가 당연히 자연스럽고 아무 거리낌이 없겠지만, 그간의 세월을 안다면 라마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저지르기 직전까지만 유효한 것! 라마는 다리를 무사히 건너 연착륙하는 중이었다.
라마는 소모임에서 만났던 위디야와 제법 말이 잘 통했다. 위디야는 스위스에서 온 라마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여성이었다. 라즈니쉬의 책을 읽고 감명받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라마는 어떤 점이 그리 감명 깊었기에 그녀가 이역만리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 궁금증을 위디야가 직접 풀어주었다.
“여기 오기 전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었는데, 어쩌다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는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었는지, 그가 나를 정말 사랑했었는지 혼란스러웠죠. 그런데 거기에 빠져, 이게 진짜 사랑이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우울하고, 나 자신에게도 더 큰 상처가 되더군요.”
이야기를 꺼내자 그때 생각이 떠올랐는지 위디야는 좀 걷고 싶다고 했다. 라마는 괜한 걸 물었나 싶어 미안해했다. 위디야는 괜찮다며 라마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난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죠.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제 친구 하나가 책을 읽어보라고 주더군요. 그게 라즈니쉬의 책이었죠. 그는 너무나 달랐어요. 사랑은 관계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라는 말, 사랑은 명상의 향기이며 명상을 통해 완성된다는 말, 암튼 그 책이 나를 내 중심으로 돌려놓았죠.”
위디야는 어느새 신이 나서 종달새처럼 지저귀었다.
“그래서 직접 그를 만나보고 얘기도 나누고 명상도 경험해보고 싶었죠.”
“직접 와서 경험해보니 어땠나요?”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는 것이 조금 힘들긴 하지만 모든 면에서 아주 만족스러워요. 이젠 적어도 옛날의 나로 되돌아가진 않을 것 같아요”
“당신이 그토록 찾고 싶었던 참된 사랑의 의미는 어떻게 되었나요?”
“아직은 어렴풋해요. 하지만 사랑은 존재의 상태라는 말이 점점 더 크게 와닿고 있어요.”
라마도 지난날을 그녀에게 얘기해주며 두 사람은 훨씬 더 가까워졌다. 라마는 내색은 안 했지만, 위디야도 그러길 바라면서, 점점 그녀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끌림은 설렘으로 영글어가고 있었다. 라마는 예전엔 억누르기 바빴던 바로 그 마음을 이젠 어쩌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라마가 아쉬람에서 아침 명상을 끝내고 나왔을 때 위디야가 불렀다. 라마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위디야도 다가와 여느 때처럼 팔을 벌려 서로를 안았다. 그런 다음, 마치 돌발상황처럼 위디야의 입술이 라마의 입술로 다가왔다.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라마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위디야의 입술이 라마의 뺨에 닿고 말았다.
라마는 위디야의 갑작스러운 행동도 그랬지만, 자신의 무의식적인 반응에 더 놀라고 말았다. 더는 이런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기에, 이젠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한 터였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위디야에 대한 호감이 있었기에 더 그랬다. 라마는 생경한 분위기를 어찌해볼 요량으로 본능적으로 웃었다. 위디야도 고백에 실패한 사람처럼 계면쩍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정작 아쉬웠던 건 다음 상황이었다. 위디야가 내일 스위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건 위디야의 호감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작별의 세레머니이기도 했다. 라마는 이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으로만 통제되지 않은 몇 가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었다. ‘좋아한다고 그냥 말할까, 왜?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라고 말할까, 차라리 내가 입맞춤을 다시 시도해볼까.’
그러는 사이 딱하게도 입은 안녕을 말하고 있었다.
“잘 가요. 위디야. 가면 다시 돌아올 건가요?”
“글쎄요. 앞일은 알 수 없는 법이지만, 지금 같아서는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그러길 바라요. 신이 우리 둘 사이를 허락한 시간이 좀 더 남아있다면 좋겠네요.”
“나도 그러길 바라요. 그리고, 어디에 있건 당신의 존재를, 당신의 삶을, 당신의 수행을 지지할게요.”
바람이 제법 휭 불었다. 아쉬람 거목들이 한바탕 바람의 춤사위에 응답하듯 이파리를 소나기처럼 파르르 흩뿌렸다. 몬순의 전조였다. 설렘이 사랑으로 채 무르익기도 전에, 라마는 서로의 마음만 엉거주춤 확인한 채 위디야를 낙엽과 함께 떠나보냈다.
되돌릴 순 없겠지만, 통석하게도 라마는 위디야를 떠나보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사랑의 강에 뛰어들 준비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라마는 이런 자신이 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나간 건 어디까지나 지나간 거니까. 그나저나 몬순 직전이라 그런지 하늘이 뒤숭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