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괴로울 땐 근원을 살펴봐요.
철학의 삼원소
요가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사유가 좀 필요합니다. 철학적 사유라고 하니 덜컥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 아직 침착하다고요?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그 철학적 사유란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본질적이고도 단순한 세 가지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이고, 세계는 무엇이며, 신이란 어떤 존재인가가 바로 그 질문이지요. 색에도 삼원색이 있듯이 철학에도 삼원소가 있습니다. 나. 세계. 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철학이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인생의 삼원소이기도 하지요.
내가 있습니다.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나 여기에 있지요, 거기가 아니라.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릅니다. 분명한 건 어쩌다 태어나서 보니 나는 여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있는 여기를 세계라고 부릅니다. 몇 생을 살아도 결코 다 경험할 수 없는 내 모든 경험의 대상이지요. 나도, 세계의 출처도 미스터리이긴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나는 세계의 어떤 부분을 매 순간 경험하며 세계와 관계를 맺습니다. 이렇게 맺은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삶이라고 합니다. 나는 누구이고, 세계는 무엇이길래 이렇게 관계를 맺게 되는 걸까요? 그리고 나를 있게 하고 세계를 있게 한 건 무엇일까요?
점점 머리만 아프고, 뭔가 딱히 와닿지도 않는다고요? 이해합니다. 그럼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세계라는 말도 왠지 추상적인 냄새가 많이 나니 세상이라는 말로 바꾸겠습니다. 세상 살다 보면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되지요? 이제 좀 와닿나요?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괴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다행히 약한 파도일 때도 있지만, 어쩔 땐 해일처럼 감당하기 버겁습니다. 점점 더 와닿지요?
약한 파도일 때는 어물쩡 넘어갑니다만 해일일 땐 달라집니다. “왜 이 사달이 났을까?, 나는 왜 이 일로 이렇게 고통을 겪을까?,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이렇게 되지요? 어떻습니까? 위에서 말한 철학의 삼원소가 다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게 어디에 등장하냐고요? 잘 보십시오. 이 사달을 일으키는 세계와 그 일을 겪는 나 그리고 무심한 하늘(신). 이제 잘 보이지요?
이 삼각 편대가 슝하고 굉음을 일으키며 내 인생을 가로지릅니다.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연속으로 가로지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냥 가로지르는 법도 없습니다. 마음에 생체기를 훅 남기지요. “인생이 원래 이런 거 아니겠어”라고 하면서 이대로 그냥 놔둘 건가요? 이렇게 매번 당할 겁니까?
그럴 순 없지요. 자, 정신을 차리고, 호흡을 가다듬고, 이 문제를 한번 가만히 들여다볼까요? 어떻습니까?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나요? 너무 성급하다고요? 아, 알겠습니다. 저도 깊이 호흡 한번 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이제 준비가 되셨다고요? 그럼 차근차근 함께 가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