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 가지 니야마 1
그다음은 다섯 가지 니야마(niyama)입니다. 야마에 ‘가까이’를 뜻하는 접두어 ni가 합쳐진 말입니다. 야마보다는 강제성이 조금 덜한 느낌을 주지요. 그래서 준수라고 번역했습니다. 니야마도 다섯 가지입니다. 종교에서는 주로 야마는 금계(禁戒), 니야마는 권계(勸戒)라고 하지요. 요가를 종교로 인식하고 수련하지는 않으실 테니까 금지와 준수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경문을 한 번 살펴볼게요.
청정, 만족, 고행, 자기 학습, 자재신 경배가 권계이다.
śaucasaṃtoṣatapaḥsvādhyāyeśvarapraṇidhānāni niyamāḥ
샤우짜 산또샤 따빠하 스와디야예쉬와라쁘라니다나니 니야마하
첫 번째 샤우짜(śauca)는 √śuc(젖다/깨끗해지다)에서 온 말입니다. 물로 씻어서 깨끗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청정(淸淨)으로 번역합니다. 인도인들이 강가(gaṅgā)에서 목욕하는 거 TV로 보셨지요? 우리한텐 갠지스(Ganges)강이 더 익숙할 겁니다. 강가의 영어식 발음이 갠지스입니다. √gam(가다)에서 온 말입니다. 강은 흘러 가지요? 그래서 문자적으로 강가(gaṅgā)는 ‘가는 것’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불경 한역본에서 항하(恒河)로 음역하지요. 금강경에 보면 “강가 강의 모래(강가나디 왈루까; gaṅgānadīvālukā)”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아주 아주 많다는 표현이지요. 우리도 ‘모래알처럼 많다’라고 하지요? 항하사(恒河沙)로 한역(漢譯)됩니다. 우리나라 숫자 단위 아시지요? 일, 십, 백, 천, 만, 억, 조, 경, 해, 자, 양, 구, 간, 정, 재, 극, 항하사, 아승기…. 항하사가 보이지요? 현재 10의 52승으로 쓰입니다만, 실제로 쓸 일은 없습니다. 아무튼 산스끄리뜨 ‘강가 강의 모래’가 공식 숫자 단위로 편입되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뒤에 나오는 아승기(阿僧祇)도 셀 수 없음을 뜻하는 산스끄리뜨 asaṁkhya(아샹캬)의 음역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일단 강에서 씻으면 몸이 깨끗해지겠지요? 그런데 인도인들(정확히는 힌두교인들)이 동네 강 놔두고 일생에 한 번은 성스러운 도시 바라나시의 강가(gaṅgā)에서 목욕하고자 기를 쓰는 이유는 신의 가피(加被)로 마음에 쌓인 세세생생의 죄업을 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신화에 따르면 강가는 히말라야에 사는 쉬와(śiva) 신의 머리카락이거든요. 히말라야 꼭대기까지 가서 직접 부탁하긴 어렵다 보니 쉬와 신의 머리카락인 강가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도 효험이 있는 걸로 믿는 거지요. 남의 신앙을 두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니 논평하진 않겠습니다. 꼴랑 청정 하나 가지고 뭔 썰이 이리도 기냐고요? 말씀드리지요.
위야사(vyāsa)의 요가수뜨라 주석서에 따르면 청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외적인 청정과 내적인 청정이 있는데, 외적인 청정 중 하나가 물로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고, 내적인 청정은 “마음의 때를 씻는 것(cittamalānāmākṣālanam)”입니다. 성스러운 강가(gaṅgā)에 몸을 담그는 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거란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몸도 씻고 마음도 씻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셈이지요. 썰이 길었던 이유를 아셨겠지요?
마음의 때를 씻는다는 오래된 종교적 관념에서 비롯된 행위 중 하나가 목욕재계인데, 이것으로 마음의 때 즉, 죄업이 씻겨나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욕재계를 시작으로 이제부터 새사람이 되겠다는 결심 정도로 받아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더 바라면 욕심쟁입니다. 마음의 때를 씻으려면 지난 잘못을 참회 또는 회개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마음에 자리 잡은 독소(탐진치)를 없애려고 노력해야겠지요. 마음은 본디 청정하니 때가 낄 곳이 없느니라 이러지 마시고요. 청정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요가수행자랍니다. 한번 담갔다고 해결된 걸로 믿으면 신자(信者)고요. 그리고 외적인 청정 중 나머지는 몸을 가볍게 해주는 깨끗한 음식을 먹는(메댜뱌와하라나; medhyābhyavaharaṇa) 겁니다. 하타요가에서는 미따하라(mitāhāra)라고 하지요. 적절한 음식이라는 뜻입니다. 하타요가의 주요 경전에는 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의 목록까지 나열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신체 정화법인 여섯 행법(샷까르마; ṣaṭkarma)에 대해서도 설명하지요. 하타요가는 진정 몸에서 시작하므로 몸의 정화에 진심입니다.
두 번째는 산또샤(saṃtoṣa)입니다. √tūṣ(만족하다)에서 온 말로, 만족이라는 뜻이지요. 나물 먹고 물만 마셔도 만족하면 그 자리에 즐거움이 있다고 하지요. 야구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잠시 다녔었는데, 입학하자마자 응원가로 배웠지요.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자리에 누우니 대장부의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다. 어기야 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논어의 말씀을 오마주(hommage) 한 걸까요? 이게 왜 응원가로 불려야 했을까요? 혹시 궁금해하실까 봐 논어의 원문을 올려놓습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우니 즐거움이 그 안에 있음이라(飯蔬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주석서에는 “지금 가진 것에서 더 바라지 않음(sannihita sādhanād adhikasyānupāditsā)”이 만족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sannihita) 가진 걸(sādhana) 찬찬히 떠올려보면 “이게 정말 다 필요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달라이 라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미국에 초청되었을 때 그곳 백화점에 들른 적이 있는데, 눈길을 사로잡는 물건 앞에 발길이 머물면 ‘이게 정말 내게 필요한가?’라고 묻는다. 그러면 대부분은 필요치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있다면 외적인 필요는 줄어들 겁니다. 그리고 필요한 건 이미 다 채워져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이런 만족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사랑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