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계묘년 설날 아침이다.
아침 떡국과 함께 한 살 더 먹었다.
제일 어른이신 어머니에게 돌아가며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며 세배를 드린다.
어머니는 손주 경현이와 서연이에게 세배를 받으시고 미리 준비하신 빳빳한 오만 원권을 아이들에게 세뱃돈으로 주신다.
"삼촌한테도 수금해야지"라고 내가 말하니 나에게도 세배를 한다.
나 역시도 오만 원씩 세뱃돈으로 주니 조카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방글방글하다.
자기들 아버지의 사촌동생인 5촌 당숙 아저씨에게도 세뱃돈을 타낸다.
40살 먹은 육촌 조카가 동생 남매가 귀여운 듯 자기에게도 세배하라고 하며 5만 원씩 세뱃돈을 준다.
설날은 으레 애들이 수지맞는 날이다.
19살, 15살의 조카들에게는 세뱃돈 받는 이런 즐거움이 설날이 기다려지는 이유일 것이다.
15살 서연이는 수금된 세뱃돈을 자기 아빠에게 맡긴다.
"서연아 아빠한테 그 돈 나중에 꼭 받아내라 떼이지 말고..."
동생 편들기보다는 조카 편드는 게 인생 경험에 따른 합리적 선택이다.
내가 열 살 때쯤이고 동생이 다섯 살 무렵에 어머니에게 떼여 먹힌 돈이 생각났다.
1976년 당시에 유행했던 19,800원짜리 오트론 TV 스포츠 게임기를 사기 위해 나와 동생은 사력을 다해 돈을 모았었다.
오트론 TV 스포츠 게임기는 사격과 축구, 테니스 등을 텔레비전에 연결하는 콘솔 게임이었다.
동생과 나는 그 게임기를 너무나 갖고 싶어 했다.
집에 손님이 오시면 동생과 나는 쪼르르 손님들 눈에 계속 띄게 있었다.
손님이 주시는 용돈을 탐하는 어린애들의 간악함이었다.
지금의 서연이도 똑같은 짓을 한다고 동생은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집에 오시는 손님은 아이들의 용돈벌이의 넘버원 출처이다.
19,800원이면 지금 돈으로는 70~80만 원 정도 하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동생과 나는 용돈 한 푼 안 쓰고, 손님들이 주시는 용돈까지 해서 한 달여 만에 이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모았다.
어머니에게 맡겼었는데 돌려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전화기를 놓으셨다.
우리 집의 첫 번째 전화기였다.
모든 집에 집 전화기가 있던 시절은 아니었기에 어머니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전화기를 들여놓으셨다.
동생과 나의 버킷리스트가 어머니의 버킷리스트로 치환되었던 것이다.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식들 돈 떼어먹었던 어머니가 이해되는 나이가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그깟 게임기보다는 집안 살림이 되는 전화기의 장만이 우선순위였을 것이다.
동생말에 따르면 조카들이 모은 돈이 경현이는 4백 정도 서연이는 3백 정도란다.
19살, 15살 그 나이에 결코 적은 돈은 아니다.
백만 원 정도의 예금액의 차이는 서연이의 아이돌 덕질때문이라고 한다.
그 나이의 소녀답게 굿즈 등의 구입비가 필요한가 보다.
서연이는 세븐틴의 팬이다.
많이 모았다고 놀라움을 표하니까 "저는 돈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고고함을 표한다.
웃음을 불러오는 고고함이다.
아마도 서연이가 열 살쯤 무렵일 것이다.
한 번은 서연이가 지 오빠 경현이한테 애답지않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다.
오빠가 마음에 안 들 때 일종의 거리 두기를 표하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지켜보던 내가 "서연아 그러다가 오빠 화나겠다" 했더니 "그러다 한대 맞겠죠!"
맞을 것을 각오하면서도 존댓말로 불만을 표하는 대범한 깜찍함에 웃음꽃이 절로 피워졌다.
어렸을 때는 꼬박꼬박 붙어 다니던 경현이 서연이가 이제는 말끝마다 서로 비난조의 야유를 한다.
이제 쪼금 크니 현실 남매의 모습을 그 케미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모습들 또한 어른들의 눈에는 귀엽기 짝이 없다.
티 없이 행복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푼수에 맞지 않게 교차 생각되어지는 것이 있다.
행복한 아이들도 있는 반면 그 건너편에 대조적으로 순간순간이 힘든 아이들도 있다.
삼십 년 전쯤의 신촌의 겨울 거리가 생각났다.
그때 당시의 신촌 거리는 홍대 거리가 활성화되기 이전 서울의 가장 커다란 번화가 중에 한 곳이었다.
동네 친구였고 야학도 같이 했던 경도랑 몇몇 친구들하고 신촌 거리를 지나가다가 영철(가명)이를 우연히 만났었다.
경도와 나를 보더니 영철이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딱 봐도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아 보이는 씩씩하고 활달한 영철이는 우리가 야학을 했던 애육원의 원생이었다.
"어 형들!"
"엉 영철이네 영철아~"
"형들 여긴 웬일들이세요, 오랜만이에요! 저 얼마 전에 애육원에서 나왔어요"
"그래? 그럼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데?"
"예 친구하고 같이 자취해요"
어느 동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고아원, 애육원 등의 보육 시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나와야 한다.
그해 겨울의 영철이는 봄이 되면 졸업해야 하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
영철이도 일행이 있어서 각자의 일행들에게로 돌아갔다.
짧은 만남이었고 그날 이후 영철이를 본 적은 없다.
이십 대 초반 들어 나름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해서 했던 것이 고아원 야학이었다.
목요일 오후였나 일주일에 한 번씩 오류동에 있는 애육원을 방문하여 애들 공부도 봐주고 같이 놀아주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직장인도 몇몇 있었던 '우리네'라는 이름의 연합서클이 야학의 주체였다.
서클은 요즘의 동아리를 말한다.
오후 다섯시에 시작했던 야학은 저녁 아홉시쯤에 끝났다.
야학이 끝나면 모두들 술 한 잔씩 같이 했다.
야학을 하는 각자의 의미가 투합해서인지 모임 사람들과의 인연은 끈끈했다.
햇살 좋은 봄날이면 또는 알록달록 단풍 진 가을 날이면 공원으로 산으로 함께 사진을 찍으러 다니기도 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망원렌즈 달린 카메라를 넘버원 애장품으로 여기는 한 살 많은 선진이 누나가 항상 사진사를 자초했다.
후지 필름의 사진보다는 코닥 필름의 사진이 색도 선명하고 코닥 특유의 색감이 있어 더 좋아했었던 기억이 나에게는 있었다.
애육원 보모 선생님도 생각이 난다.
우리들보다 한두 살 정도 어려 보였던 선생님인데 야학의 의미를 찾는데 골몰한 우리들하고는 너무나 달라서 인상적이었다.
치기 어린 손님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에 비해 사감인듯하고 수도자인듯하기도 한 엄격함이 행동 하나하나에 묻어있었다.
엄청 큰 대형 고무다라이에 애들 옷들을 잔뜩 넣고 발로 밟으며 빨기도 하고, 애들이 말 안 듣고 장난치면 팔뚝을 잡고 볼기짝도 사정없이 때리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는 엄마, 누나, 언니 그 자체였다.
일주일에 한번 봉사랍시고 찾아가는 우리들한테는 그 선생님은 성스러워 보였다.
그 선생님의 희생처럼은 엄두도 안 나 존경심마저도 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물질의 빈곤이 아니라 사랑의 빈곤이다.'라고 했던 테레사 수녀를 연상시키는 선생님이었다.
어쭙잖은 자기만족의 봉사보다는 돈을 많이 벌어 기부를 하는 게 그나마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 선생님이었다.
보육 시설의 아동은 만 18세가 되면 보호 종료 아동이 되어 퇴소해야만 한다.
오늘날에는 자립준비 청년이라는 용어로 불리며 매년 2,600여 명이 보호 종료 후 사회에 나온다.
단지 수중에는 자립금으로 5백만 원 정도만 쥐어지고 3년간 지원하는 월 30만 원의 자립수당이 전부다.
요즘이나 5백만 원이지 지금 40세인 고아원 출신 어떤 이는 자립금으로 30만 원 받고 나왔다고 했다.
보호의 울타리가 걷혀지며 오롯이 혼자의 힘만으로만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부모의 울타리는 상상하는 것만도 그들에게는 사치일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사회에 나오기 전에 5백만 원이라는 큰돈도 만져본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는 나이이기도 해서 쉽게 사람을 믿어 사기를 당한다.
의도적으로 연락이 닿은 친부나 친모에게 속아 돈을 모두 잃기도 한다.
친부모가 자립금을 탐해서 연이 이어진 것이다.
없는니만 못한 부모가 오히려 끈지 못할 악연이 되기도 한다.
보다 나은 장래를 위한다면 학업을 지속해야 할 텐데 쉽지가 않다.
자립준비 청년의 2016년 통계 대학 진학률은 일반학생 진학률 71%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44%이다.
혹여 진학하게 되어도 학비, 생활비 등의 마련은 막막하다.
덮씌어진 삶의 굴레 그 서글픔이 짙어질 수밖에 없다.
외로움에 지치고, 인생살이의 힘듦에 술이나 담배에 의지하게 된다.
미혼모가 되기도 하고, 노숙자가 되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일들로 삶의 벼랑 끝에 몰린다.
그러다 보니 자살도 많이 생각하고 실제 극단적 선택을 택하기도 한다.
작년 2022년 8월에도 자립준비 청년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뉴스를 두 번이나 보았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단돈 5백만 원만 쥐고 내가 그 상황에 던져진다면 어떠할까?
영철이가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때의 보모 선생님을 보면서 나름 각성한 '자기만족의 봉사보다는 기부'라는 지향점은 그 후 항상 함께 했다.
부끄럽지만 실행에 옮긴지는 몇 년 안된다.
적은 금액이지만 카드 자동 결제로 국경없는의사회(Médecins Sans Frontières)에 매달 지원을 하고 있다.
어머니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후원하고 계신다.
덕을 쌓으시라는 권유에 어머니도 호응하셨다.
살면서 커다란 부를 이루면 기부하리라라는 생각은 항상 갖고 있었지만 커다란 부는 아직까지도 요원하다.
이러다 평생 기부 한번 제대로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편한 마음에 살면서 일상에서라도 작은 기부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어졌다.
그래서 선택한 기부가 국경없는의사회의 지원이었다.
네이버 사이트에서 기부단체를 검색하면 유료 광고를 하는 파워링크에만 40여 개 단체가 광고를 하고 있다.
기업들이 제품 광고 경쟁하듯 기부단체의 광고도 그에 못지않은 경쟁이다.
마구잡이식으로 TV 광고, 온라인 광고 등을 하는 것을 보면 기부금이 필요한 곳에 제대로 쓰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느 기부단체를 선택해서 기부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하는 생각으로 기부단체에 대해 나름 알아보기도 했다.
기부한 사람은 누구도 그러하듯이 자기 기부금이 제대로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기부단체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들이 오랜 전부터 꾸준히 있어왔다.
유흥업소에서의 접대, 휴가비 등을 기부금으로 사용했다는 황당한 기사들을 접해봤다.
직원들의 평균 연봉이 5천~6천만 원 정도로 적은 연봉은 아니다.
단체 수장의 항공료가 640만 원이라는 호화 출장 기사도 접했다.
배임 미수, 부정채용 시도, 직원에 대한 성희롱 등의 심각한 기사도 접했다.
기부금을 위해 많은 수의 단체가 경쟁적으로 광고를 하다 보니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 문제가 심중해 보인다.
빈곤 포르노는 더 많은 모금 유도를 위해 가난에 대한 실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극적인 편집으로 감정을 유도한다.
이러한 감정 유도는 단기적으로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해 후원을 이끌어낼 수는 있지만 단발성 기부나 짧은 후원에 그치고 만다.
역으로, 특정 대륙이나 국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인종차별적인 부정적 편견 또한 야기하기도 한다.
잘못된 캠페인으로 오히려 특정 국가나 인종, 민족의 장기적인 발전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이러한 빈곤 포르노를 기부단체들이 거리낌 없이 한다.
조금이라도 더 매출을 올려보겠다는 행태이다.
기부단체를 선택하는 것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국경없는의사회도 다른 기부단체들처럼 광고는 진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없는의사회를 선택한 것은 활동가가 단체 명칭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의사, 간호사 등의 의료인이다.
2021년 한국고용정보원 기준으로 의사들의 평균 연봉은 1위 정신과 1억 3,626만 원이며, 2위 성형외과 1억 3,130만 원이며, 3위는 외과, 산부인과 공동으로 1억 2,562만 원이다.
9~12개월 단위로 파견되는 국경없는의사회의 파견인 초봉은 1,000달러 내외라고 한다.
일반 의사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데도 희생과 봉사의 마음으로 감수하는 게 감동적이었다는 게 선택의 이유였다.
재정의 투명성이 탁월하다는 것도 선택의 이유가 된다.
국경없는의사회 한국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민간후원금 사용내역을 보면 알 수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은 2021년 민간 후원금 중 81%를 구호 프로그램 및 인도주의 활동에, 모금 활동비 18%, 일반 경상비로 1%를 사용하였습니다.'
나의 작은 기부가 소중한 약 값으로 의미 있게 쓰이길 바란다.
운영하고 있는 쇼핑몰이나 유튜브가 잘 돼서 부가 쌓인다면 가능한 기부는 많이 할 생각이다.
국경없는의사회에 하는 기부는 지금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기부는 자립준비 청년들에게 따뜻한 햇살이 되고 싶다.
영철아, 이 추운 겨울날 어떻게 지내니?
자립준비 청년에 대한 기사 링크입니다.
"밥 못 먹은 지 2주 됐어요" 18살 됐으니 무조건 나가라 [뉴스.zip/MBC뉴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fstM-5UX_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