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파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을 우리는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래 그림은 피카소 작품인 <바이올린과 포도>입니다.
이 그림에서 피카소는 입체주의 미학을 담아 바이올린의 형태를 해체해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난해합니다.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모호합니다.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미술사를 어느 정도 이해하여만 합니다.
처음의 미술은, 고대 시대 최초의 미술은 주술적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동굴벽화나 동굴 천장에 그려진, 원시시대에 그려진 동물들은 사냥꾼들의 주술적 기원을 담은 그립입니다.
사냥감을 그림으로 그리기만 하면, 동물들이 그들의 힘에 굴복할 것으로 생각해서 그렸을겁니다.
주술적 용도라 애절하기도 합니다.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비로운 힘을 빌려 해결하려고 했으니까요.
고대에서 이집트 시대로 넘어오면, 이집트 미술은 미술가가 주어진 한순간에 무엇을 볼 수 있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장면에 대해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이 중요했습니다.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관념적으로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을 그리는 것. 그것이 이집트 미술입니다.
미화하지 않고 지도를 그리듯 최적화된 각도로 사물을 표현했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이집트 벽화 <헤지라의 초상>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그린다면 얼굴은 측면을, 눈은 정면을, 몸도 정면, 팔과 다리는 측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이집트 미술의 법칙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형태 속에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그려 넣게 만든 규칙을 따랐을 뿐입니다. 아래 그림은 <네바문의 정원>입니다.
연못이 있는 정원을 그린 그림이 있다면, 나무들은 측면에서 보아야만 명확할 것이고, 연못의 형태는 위에서 보아야 분명해지죠.
이집트 미술가들의 연못이 있는 정원 그림은 연못은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나무들은 옆에서 본 것처럼 그렸죠.
반면, 연못속은 위에서 본대로 그린다면 쉽게 알아볼 수 없으니, 옆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마치 어린애들 그림처럼말이죠.
이집트인들은 배워서 익힌 지식을 기초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와 달리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렸습니다.
그리스시대의 예술품 <원반 던지는 사람>, <밀로의 비너스> 등을 보면 사실적인 표현에 집중해서 입체적이고 역동적입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지역에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어 그리스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시대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이때의 미술가는 뼈와 근육의 해부학적 구조를 탐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태에 관한 지식을 중요시하여 옷자락의 옷 주름을 이용하여 인체의 형태를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집트,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중세 시대가 도래합니다.
이때에는 미술이 교회의 도구로 전락해서 오직 신, 즉 본질만을 그리게 했습니다.
평면적이고 이야기의 본질에만 충실하게 됐고, 명확성을 중요시했던 이집트의 관념이 되살아났죠. 이때부터 중세 미술 암흑기 1000년이라고도 합니다.
11세기 노르만족이 영국을 침략하면서 영국의 영주가 된 노르만인들은 수도원과 교회당을 건립했습니다.
이러한 건물들을 세운 양식은 영국에서는 노르만 양식이라 불렀고, 유럽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불렀습니다. 이 양식은 노르만 침략 이후 백 년 이상이나 번창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 이후에는 뾰족한 첨탑과 수직적 느낌의 고딕 양식이 성행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 양식, 지금 듣기로는 뭔가 우아하게 들리지만 사실 원래 그 의미는 업신여겨 낮추어 부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로마네스크는 어설프게 로마를 흉내 낸 것이었고, 고딕은 야만적인 고트족 취향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트족 때문에 로마 제국이 멸망했다고 생각했으므로 고딕은 야만적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문화재나 문화적 예술품을 쓸데없이 파괴하는 짓을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부르는 것처럼말입니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의미합니다. 이 르네상스의 서막을 연 화가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입니다. 조토는 미술의 진정한 부활을 유도해 낸 거장이었습니다.
르네상스는 신을 그렸던 미술가에게 다시 사람을 그리게 했습니다. 인간을 표현했던 그리스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조토의 활약은 미술이 르네상스 시기로 넘어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됩니다.
조토의 <신앙>이라는 작품을 보면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환조 같은 느낌의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환조는 삼차원적으로 구성된 입체적인 조각입니다. 그림에서 입체감을 통해 깊이감을 느끼게 해줬습니다.
조토 이전 중세 시대 예술 작품의 영광은 모두 교회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조토 시대부터 모든 찬사와 명예가 미술가의 몫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조토 이후로 다른 나라에서도 미술사란 위대한 미술가들 역사가 된 것입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영광스러운 과거를 다시 부흥시켜야 한다고 믿었고, 이런 자신감과 희망이 나타난 곳이 조토의 고향 피렌체였습니다. 15세기 초에 일단의 젊은 미술가들이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르네상스라는 변화를 이끌었는데 바로 건축가인 브루넬레스키, 조각가인 도나텔로, 화가인 마사초였습니다.
마사초로부터 최초의 원근법이 시작됐습니다. 마사초의 원근법 이전에는 그림에서 인체나 물체를 비스듬히 놓아 실제의 길이보다 짧게 보이게 해서 거리감을 표현했던 단축법을 사용했습니다.
오늘날의 미술에서야 원근법이야 일상적인 게 됐지만, 마사초의 원근법을 처음 본 사람들은 놀랐을 겁니다. 획기적으로 느꼈겠죠.
16세기 초엽은 이탈리아에 있어서도 전 세계 미술사에 있어서도 가장 위대한 시기였습니다. 르네상스의 3대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함께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면 초상화의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죠. 웃는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미소는 신비하게 보입니다.
화가는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아야 하는데, 윤곽을 선명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같이 희미하게 남겨두면 번짐효과로 신비스러운 실루엣이 만들어지죠.
이것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창안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의 효과입니다. 다빈치의 천재성을 상징하죠.
미켈란젤로는 <다비드>, <피에타>를 조각했던, 원래 화가가 아닌 조각가였습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부탁했습니다.
성당의 벽면에는 보티첼리(Botticelli), 기를란다요(Ghirlandajo)와 같은 전 세대의 거장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었죠.
때문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에게는 부담이었고, 자신이 화가가 아닌 조각가라고 변명을 하면서 교황의 주문을 맡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조각가로서 경쟁 관계에 있던 브라만테(Bramante)가 미켈란젤로를 시기하여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작업하게 하도록 교황을 설득했습니다.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완성 못 할 것으로 생각해서겠죠.
미켈란젤로는 할 수 없이 작업에 착수하여 4년간의 작업 후 천장화를 완성했습니다. 거대한 공간을 그림으로 채운 한 사람의 육체적인 작업은 거룩함을 느끼게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조물주가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듯이 라파엘로의 성모상도 많은 사람들에게 성모의 진정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게 했습니다. 자신만의 새로운 미술 차원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이들 천재 미술가들의 등장은 다른 미술가들에게는 혼란을 줬습니다. 16세기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은 그들 세 명의 천재들의 작품을 모사화 하는 습작 수준에 머물르게 됩니다.
르네상스 다음으로 찾아온 이 시대를 매너리즘시대라고 합니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업신여겨 낮추어 부르기 위한 것이었던 것처럼 매너리즘도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알아야 할 미술 양식은 바로크입니다. 17세기의 예술 경향에 반감을 품었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조롱하기 위해 사용했던 바로크라는 말도 사실은 기괴하고 터무니없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천재들은 또 나타났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플랑드르 출신의 루벤스와 네덜란드 출신의 렘브란트가 있습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가 마지막에 보려 했던 그림이 루벤스의 그림이었고,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으로 유명합니다.
밀레, 쿠르베 등의 사실주의도 새로운 조류로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 와중에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진의 발명과 발달은 미술가들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없었습니다. 사진 이후로 나온 게 인상주의였습니다.
사진기가 잡아내지 못하는 그 찰나의 이미지, 인상적인 순간을 포착해 캔버스에 옮기는 아주 인상적인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사진 기술을 따라갈 수 없는 인간, 그럴 바에는 우리 눈에만 보이는 것을 그려내자 하는 게 인상주의의 시작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인상주의자는 마네, 모네, 르누아르,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등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반 고흐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화방에서 일했던 동생 테오가 반 고흐를 인상파 화가들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테오는 자신도 가난했으면서도 형을 성심껏 도와주었습니다. 작품 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남프랑스 아를로 가는 여비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고흐는 정신병으로 고생하다가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화가로서의 경력은 10년 남짓이었지만 9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가 그렸던 해바라기, 빈 의자, 사이프러스 나무, 초상화들의 복제품은 오늘날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고흐 자신이 살아생전 원했던 일이었죠.
고흐 살아생전 상업적으로 판매된 작품은 지인이 사준 단 한 점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위대했던 화가의 어두웠던 인생이었습니다. 고흐는 살아생전 실패한 화가였죠.
고흐가 죽은 후 동생 테오도 6개월 후 죽습니다.
잘 알려진 얘기지만, 테오의 아내 요한나는 테오와 친분이 있던 미술계 인물들을 중심으로 고흐의 작품을 소개했고, 네덜란드의 화랑에서 고흐의 그림을 전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게다가 고흐가 테오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로 출간하여 고흐의 명성이 올라가는데 기여했습니다. 오늘날 고흐가 알려지게 된 건 요한나 덕분입니다.
1930년대부터 빈센트 반 고흐는 전 세계적 인기를 가진 대중적인 화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요한나는 테오의 무덤을 이장하여 고흐와 테오의 무덤을 나란히 하게 하여 두 사람의 형제애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대단한 여자였죠.
20세기로 넘어와서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 러시아 출신 추상 미술의 창시자 칸딘스키, 프랑스 출신 야수파 마티스, 스페인 출신 입체파 피카소가 대표적인 화가들입니다.
자. 이제 마무리 부분입니다. 피카소의 그림이 왜 그리 어려운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피카소의 작품 중 <바이올린과 포도>를 보면 어떤 면으로는 소위 이집트인의 원칙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집트 미술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그리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피카소는 이집트 양식을 진화시켜 표현했습니다.
눈을 감고 바이올린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생각, 즉 선율, 향, 질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정면, 옆면, 측면도 떠오르죠. 피카소는 그것들 모두를 그린 것입니다.
마음의 눈과 신체의 눈으로 보이는 것들 모두를 그렸죠. 다양한 각도를 표현한 게 바로 피카소의 <바이올린과 포도>입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피카소가 작품들을 그냥 되는대로 막 그린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피카소는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피카소의 그림 실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그가 11살에 그렸던 소묘(아래 그림, 토르소 소묘) 인데 명암 표현이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입체파 작품 이전부터 그의 회화 실력은 거의 완벽했습니다. 본인 스스로 12살 때 라파엘로만큼 그렸다고 말했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E. 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를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