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편지 #28
작은 아이가 올 7월에 군대를 제대했습니다. 제대하면 아이들과 짧은 여행을 다녀오자고 아내와 계획을 세웠는데 작은 아이가 제대를 하자마자 수능을 한 번 더 보겠다고 이야기한 바람에 여행계획은 잠시 미뤘죠. 수능을 치룬 후 다시 여행 계획을 잡아보려 했지만,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바쁘다고 거절하더군요. 흥!칫!뽕! 우리끼리 간다! 오랜만에 아내와 단둘이 대부도, 정확히는 선재도에서 엊그제 1박을 하고 왔습니다.
1박만 하는 가벼운 여행이라 나는 여분의 속옷, 양말과 편한 옷만 가방에 넣는 것으로 준비를 끝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여러 옷은 기본, 가서 먹을 음식물들을 바리바리 싸서 차 트렁크 가득히 실었습니다. 여행 준비의 차이는 짐으로 나타나더군요. ‘난 모르니까’, ‘도와주는 것은 잔소리 안 하는 것이야’ 라는 생각으로 묵묵히 차를 몰고 여행지로 떠났습니다. 우린 각자의 역할이 있으니까.
아내의 역할, 남편의 역할이 정해져 있고 정해진 각본대로 따르는 걸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다고 김지혜의 『가족각본』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합니다. 저 또한 그 각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집안일을 어느 정도 같이 하지만 예전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야근도 많아 아이들이 모두 잠들면 집에 왔거든요. 아이가 어릴 땐 더 힘들었을텐데 아내가 혼자 어떻게 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 꺼내면 안될 듯해 그냥 묵혀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야근하고 한밤중에 집에 왔을 때 싱크대에 미처 하지 못한 설거지거리가 쌓인 것을 보면 한숨이 났습니다. 어떤 때는 설거지를 했지만, 지나치기도 하고, 잔소리도 했으며 싸우기도 했지요. 난 해주는 사람이라 선택이고, 아내는 해야만 하는 사람이라 의무였던 셈이었죠.
이젠 아이들도 컸고 나도 그때만큼 바깥일을 하지 않습니다. 집안일도 몇 개는 맡아서 하고요. 나는 수건과 속옷 빨래를 맡아, 세탁기 돌리고 개어 수건함에 넣습니다. 큰 아이는 겉옷 빨래 담당입니다. 그리고, 작은 아이에게 어떤 것을 시킬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집안일은 눈에 보이면 그때 그때 합니다. 밥이 없다면 밥을 하고, 우리는 물을 끓여 마시는데 물도 떨어지면 끓여 놓습니다. 화장실 청소도 가끔 하고요. 해야 할 일이 보이면 합니다. 여기서 함정은 나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보이는 집안일은 무척 제한적이죠. 나는 여행 갈 때 준비물은 가방 하나로 충분하지만, 아내의 준비는 차 트렁크 한 가득인 것처럼요. 보는 사람에 따라 해야 할 일은 천차만별이거든요. 집안일을 각자 나름대로 했지만 공평하게 나누지 못한 셈입니다.
작년 12월 『가족각본』으로 온라인 독서모임인 날벼락 독서모임을 하려고 했는데 참여가 부진하여 열리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1년 후 12월 소목회 책으로 다시 선정했습니다. 이 책은 당연한 것이 진짜 당연한가를 묻습니다. 당연했던 익숙함을 깨는 건 불편합니다. 이런 불편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지요. 아내는 잔뜩 준비한 음식물을 펜션 냉장고에 넣습니다. 구이용으로 항정살과 목살을 준비했군요. 재료는 아내가 준비했지만 요리는 내 몫입니다. 메뉴는 요리하는 사람 마음입니다. 가져온 김치에다가 고기를 넣고 자글자글 끓여 김치찜으로 내어놓았습니다. 맛있다고 합니다. 다음에도 해달라는 고도의 술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