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성운 Apr 07. 2018

4월의 레슬리

처음으로 본 왕가위 영화는 <화양연화>였다. 아마도 고3 즈음이었을 텐데, 당시에는 인물들의 감정선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장만옥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양조위란 배우를 처음 안 것도 그때였다. 내가 담배를 피우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서였지만, 그 배경에는 아마 <화양연화> 속 차우의 영향도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중경삼림>을 봤다. 정확히 2014년 6월이었는데, 시기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순간이 내 삶에서 손꼽히게 행복한 순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정확히 영화의 어떤 점이 나를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대학 후배가 유럽여행을 가는 동안 비워놓은 방, 내 물건이라고는 캐리어 하나 분량의 옷과 노트북 한 대뿐이었던 그곳에서 나는 젊은 양조위에게 반했다. 왓챠에서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코멘트는, 양조위가 모자를 벗으면서 등장하는 장면을 TV에서 애국가처럼 틀어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좋아요를 하나 더하면서 나는 이제부터 왕가위의 모든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영화를 고를 차례였다. <2046>과 <아비정전> 사이에서 고민하다 후자를 선택했다. 장국영이라는 배우가 궁금해서였다. 이름은 참 많이 들어봤는데 정작 그의 영화는 하나도 본 적이 없었다. 유명한 <패왕별희>도, <영웅본색>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홍콩 영화를 본 적도 없으면서, 나에게는 홍콩 배우라면 무조건 왕가위의 영화에서의 모습이 최고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내가 만약 장국영에게 반하게 된다면 <아비정전>보다 적절한 기회는 없을 거라고,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단정짓고 있었다.


영화는 습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지루했다. <중경삼림>의 자유분방함이나 <화양연화>의 기품 같은 특별한 무엇이 이 영화에는 없었다. 앞으로 이 1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거라는, 낭만적인 대사를 듣고도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 눈에 비친 아비는 그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옆에 두면 피곤할 게 뻔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맘보춤. 영화 역사에 남을 장면이라는 얘기를 듣고 한껏 기대치를 높였는데, 장국영은 흰색 나시에 팬티를 입고 몸을 건들거릴 뿐이었다.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인물을 좋아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당시의 나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던 때였기에, 아비의 기약 없는 권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비정전>의 실패로, 장국영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식었다. 그러니 <해피투게더>를 본 건 한참 뒤의 일이었고, 그마저도 원제가 <춘광사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였다. 봄의 빛이라니. 나는 한 글자 단어를 좋아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봄의 빛은 한 글자 단어 두 개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조합이었다.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영화 속 장면은 하나뿐이다. 아휘가 다친 보영을 침대에 눕한 뒤 보살피고 있다. 아휘가 잠든 보영을 지켜보는 모습에서, 갑자기 점프컷으로 보영이 잠든 아휘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 찰나의 표정에서 나는 보영이라는 인물을, 동시에 장국영이라는 배우를 송두리째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해피투게더>는 나의 마지막 장국영 영화였다.   


1년 전 4월, 마지막 휴가를 나와서 <아비정전>을 다시 봤다. 시간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좋은 영화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부대를 나온 시기가 우연히 그의 사망일과 겹쳤고, 재개봉 소식을 들었고, 극장에서 보면 혹시 내가 놓친 무언가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걸작이라고 칭송하는 영화를 내가 못 알아본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떨치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극장 안에는 열 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맞아. 저렇게 시작하는 영화였지. 맘보춤도 다시 보니까 느낌이 있는 것도 같네. 대형 화면에 비춰지는 영상과 내 머릿속의 그림을 천천히 대조해나가고 있었는데, 아비가 필리핀 밀림을 뒤돌아 걷는 장면에서 왈칵 눈물이 나왔다. 영혼 어딘가를 다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렇게 걷지 않는다.


3주 뒤, 나는 자유의 몸이 되어 일본으로 떠났다. 도착한 다음 날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로 트래블러스 팩토리의 노트를 샀다. 무지, 줄지, 방안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노트였다. 나는 그중 하나에 LESLIE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할 수 있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