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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운 Jul 13. 2018

똑똑함에 대한 생각

그리고 다짐 하나

어릴 때부터 나는 똑똑하다는 말을 귀에 달고 자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일곱 살 때의 일로, 내가 다니던 유치원의 선생님은 아이들 중에서 나를 콕 집어 데려다 놓고 나눗셈을 가르쳤다. 왜 다른 아이들처럼 동화책을 읽으면 안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와중에도 나는 곧잘 배웠다. 그 유치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하지만 내가 조금은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는 것과, 그 이유가 어른들이 나를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머리 속에 각인되었다.


자연스레 나는 똑똑함을 선망하게 되었다. 똑똑하다는 건 다른 아이들보다 수학 문제를 빨리 푼다는 뜻이었고, 그러면 어른들의 칭찬이 뒤따라왔다. 칭찬을 듣는 데는 금방 익숙해졌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 중요해진 건 내가 똑똑하다는 명제를 지켜나가는 일 자체였다. 호그와트에 입학하는 상상을 할 때면, 나의 1지망 기숙사는 언제나 그리핀도르가 아닌 레번클로였다. 신비한 모자가 레번클로! 라고 외치는 모습이 환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계속해서 수학 문제를 풀어나간 끝에, 호그와트는 아니었지만 똑똑한 학생들이 모인다는 고등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나는 내가 똑똑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한편,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나의 똑똑함에 대한 기준도 달라져 있었다. 학교에서 나는 수학 문제를 잘 푸는 편도, 과학 지식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공부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무렵, 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관심을 더 갖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다. 남들과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 복잡한 사회 현상을 직관과 논리로써 명쾌하게 설명해내는 사람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자면 수학 문제를 잘 푸는 건 더 이상 똑똑함의 증거가 될 수 없어 보였다. 나도 그들처럼 인정받고 싶었다. 형체도 없는 똑똑함의 인증마크를 위해 게접스럽게 뉴스와 페이스북을 읽어치웠다. 내 생각과 다른 이들의 의견을 조금씩 섞어서 그럴듯한 글을 써내기도 했다. 아주 뛰어나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나는 똑똑한 축에 속하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2016년 6월의 일이었다. 같은 해 5월 18일부터 28일까지, 나는 상경으로의 진급을 앞두고 1차 정기휴가를 나갔다. 휴가를 나가기 전날,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휴가에서 복귀하던 날에는 구의역에서 한 노동자가 열차에 치여 숨졌다. 신촌역에 들어서서 열차를 기다리려고 할 때, 전광판에서는 운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안내문이 나오고 있었다. '사상사고' 네 글자를 보며 나는 복귀시간에 늦어 징계를 받지는 않을지 두려워했다.  


두 번의 죽음은 즉시 나의 삶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강남역에서의 죽음으로 인해 특별 민생치안 근무가 편성되었다. 보통 민생치안 근무는 의경의 업무 중에서 가장 편한 축에 속했지만, 이번의 근무는 전에 없이 강도가 높았다. 주야간 근무가 별도의 구분 없이 연속해서 하달되었다. 잠은 줄어들었고 몸은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원래 나가야 했던 야간 민생치안 근무 대신 다른 근무에 투입될 거라는 공문이 부대로 전달되었다. 구의역에서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진이 있을 예정이었는데, 구의역은 내가 소속된 광진경찰서의 소관이었다. 행진은 길어야 두세 시간 안에 종료될 거라고 적혀 있었다. 근무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에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안도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곧이어 찾아왔던 비참한 기분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사람들은 두 번의 죽음을 두고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혐오범죄다. 정신질환자의 소행이다. 사회 시스템의 실패다. 사건을 분석하고 원인을 진단하는 말들이 난립했고 의견이 다른 이들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말들이 어지럽게 공중을 돌아다니며 부딪치고 있을 때, 나는 말들과 가까이 있지 않았다. 나는 두 번의 죽음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죽음에도 질량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중이었다. 이상했다. 분명 죽음은 모두가 동일한 질량을 가져야 할 텐데, 어째서 내 어깨에 느껴지는 두 질량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를 깨달은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질량이 없는 말은 죽음 앞에서 무력했다.


내 시간이, 내 삶이 죽음에 달라붙어 있어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견뎌야 하는 죽음의 수는 늘어났다.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날, 전 부대원은 외출에서 즉각 복귀해 출동을 준비하라는 문자가 왔다. 병원 주차장에서 방패를 세워놓고 대기하는 동안, 나는 어떤 논리가 우리를 이곳에 도달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죽었고, 시신이 남았다. 유가족들은 장례를 치르기를 원했고 경찰은 부검을 원했다.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가. 단순해 보이는 물음은 여느 문제에나 적용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각자의 돋보기를 가져다 댄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 말들과 내가 현장에서 목격하는 사람들의 표정 사이에는 무시무시하리만큼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어떠한 논리로도 그 사이를 온전히 이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말들에게서 멀어졌다.


이제 나는 세상을 명쾌하게만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한다. 예전의 나를 포함해서, 그들 중 몇몇은 명쾌한 진단이 가져다주는 청량감에 경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과의 향이나 과육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절단면의 매끄러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사과는 자신의 예리한 칼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진단이나 분석이 무용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증상을 거슬러 올라가 문제의 근원에 도달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를 가진다. 오직, 처방이 뒤따를 경우에만.


 그러니까, 나는 똑똑함을 사려깊은 실행의 또다른 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세상은 너무나 복잡해서,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가 서로를 옥죄고, 한쪽을 잡아당기면 다른 쪽이 줄어들고, 한쪽에서 환호성이 들리면 다른 쪽에서는 아우성을 친다. 그렇기에, 해답의 제시는 완벽한 결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마침내 문제를 해결하는 동력이 되는 건 자신의 방향이 옳다는 믿음이 아니다. 필요한 건 해답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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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헐거운 정의는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다시 내 앞에 놓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아무래도, 나는 똑똑한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실행으로 옮기기에 충분한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대신, 질문을 던지는 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나간 사람들이 놓치고 지나간 문제를 뒤따라가 발견하는 일.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모두에게 알려주는 일. 스스로 해답을 내놓지는 못해도, 다른 똑똑한 사람들을 위해 질문을 준비하는 일.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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