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Man, 2018
고등학생 때, 한글 창제를 배경으로 하는 <뿌리깊은 나무>라는 드라마가 유행이었다.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장면 하나가 있다. 노비 출신인 장혁이 광평대군에게 따져 묻는다. 새 글자를 만들면 백성들이 배울 수 있을 것 같냐고. 하루 종일 일하기 바쁜 백성들이 천 자, 만 자를 언제 배울 수 있겠냐고. 광평대군이 말한다. 한글은 스물여덟 자라고. 천… 스물여덟 자요? 그냥 스물여덟 자다. 그때 나는 울었다. 지금은 당연한 사실이 그때는 당연하지 않아서 두려웠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울었다. 실화를 재구성한 이야기의 아름다움이란 한때는 전혀 사소하지 않았던 사실들을 그러모으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나는 아직 믿고 있다.
우주 탐사의 역사를 축약된 그래프로 표현한다면 아폴로 11호의 왼쪽에는 유리 가가린이, 오른쪽에는 보이저 호가 적힐 것이다. 인류는 우주로 나갔고, 인류는 달에 착륙했고, 인류는 태양계를 탐사했다. 인류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끄럽고 수월한 선 하나가 그어진 셈이다. 그리고 <퍼스트맨>은 그 선의 수월함을 거부하는 영화다. 선을 볼 수 없어서 점 하나를 찍는 데 매달렸던 한 사람의 시간을 고스란히 화면으로 옮겨온 영화다. 상당 부분이 암스트롱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탓에 시야는 때때로 구겨지거나 흔들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비행사의 불편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을 뒤집어보면, 좁은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의 색이 옅어지다가 마침내 새까매질 때의 감동도 느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한편, 영화는 암스트롱이 달에 가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과학자로서의 호기심, 국가를 위한다는 자부심,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는 공명심. 어떤 걸 가져다붙여도 말이 되었을 테고, 또 모두가 적당히 사실이었을 테다. 그 대신 영화가 보여주기로 선택한 건 달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그가 잃어버린 것들이다. 동료들. 친구와의 밤산책. 아내와의 대화. 둘째 아들의 운동 시합. 오직 상실의 궤적을 따라서만 그의 흐릿한 내면을 짐작할 수 있다.
위대함의 커튼을 들췄을 때 드러나는 개인의 삶은 그 모습이 어떻든 '그래도'라는 말로써 용인될 여지가 많다. 그는 좋은 남편도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류의 역사에 발자국을 새긴 사람이지 않냐는 식으로. 때로는 인과의 형태로 서술되기도 한다. 그는 달에 처음 발을 딛고자 했기 '때문에' 좋은 남편도 좋은 아버지도 될 수 없었다는 식으로. 그러나 영화는, 최소한 우주비행사라는 직업의 무게가 비행사 개인의 것으로만 여겨지는 일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교신을 들으며 남편의 생사를 시시각각으로 염려하는 반려자가 있다. 친구들의 아버지가 사라지는 걸 보며 자랐고, 자신의 아버지 역시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을 아이들도 있다. 우주선 안의 비행사가 지구의 중력을 견딜 때 지상의 사람들은 중력보다 큰 상실의 가능성을 견뎌야 한다.
또 다른 상실의 가능성을 안고 아폴로 11호는 달로 떠난다. 우주선 내부에서 발생했던 위기상황의 긴박감은 결말을 알고 있는 관객마저 집중하게 만들만큼 인상적이다. 하지만 영화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우주선 바깥에서 온다. 착륙선이 달 표면을 수평에 가깝게 비행할 때,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착륙선을 놓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과 달의 윗얼굴만이 5초 남짓 화면을 채운다. 그 순간 영화는 암스트롱의 시점도 인류의 시점도 아닌 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광대한 우주 속에 선 인간의 겸허를 이보다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결국 암스트롱은 달에 도착한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예상할 수 있다. 그가 첫 발을 딛을 때 남겼던 말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달의 표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달에 도착했다'는 간단한 문장은 사실은 달 표면의 입자와 색과 울퉁불퉁함을 통해서만 증거될 수 있고, 그렇기에 우주선을 빠져나간 카메라가 360도 회전하며 달 표면을 비출 때에야 관객들은 그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사실적 재현을 고수하던 영화에 비로소 허구가 산입하는 시점은 암스트롱이 달 위에 서서 달을 내려다보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감독의 전작 <라라랜드> 엔딩 시퀀스의 대척점에 서 있다. 무수히 많은 가정으로 이루어진 <라라랜드>의 엔딩 시퀀스가 관객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가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면, <퍼스트맨>의 클라이맥스는 모든 가정을 소거시킨 뒤에 거대한 공허 하나를 남긴다. 공허는 말수가 적고, 움직이지 않기에 그 앞에 선 사람은 어떤 것이든 내뱉고 삼킬 수 있다. 이제 우주비행사는 공허와 마주한다.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묵음이다. 그래서 관객은 그가 잃어버린 것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를 지고서 목표에 도달한 인간의 내면을 상상한다. 비행사가 몸을 돌려 착륙선으로 향할 때, 달 위에는 많은 것이 남았고 묻혔다.
원래 나는 우주영화를 보면서 자주 울고, <퍼스트맨>을 보면서는 더 자주 울었다. 물론 소리는 내지 않았다. 소리를 냈더라도 나는 듣지 못했다. 암스트롱이 걸었던 월면의 지명은 고요의 바다(Mare Tranquillitatis)였다.
덧. 2015년에 NASA는 아폴로 프로젝트 당시 촬영된 사진들을 공개했다. https://www.flickr.com/photos/projectapolloarchive/page8 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