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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운 Nov 01. 2018

사람을 믿는 사람들

[언리미티드 에디션 10]에 다녀와서


지난 20일, [언리미티드 에디션 10 - 서울아트북페어 2018]에 다녀왔다. 이전의 방문이 2015년이었으니 3년의 공백이 있었던 셈이다. 그동안 나에게는 제법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했고, 책방 점원으로 잠깐 일했고,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하는 작가들이 늘었고, 독립출판을 준비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만약 독립출판의 세계라는 게 존재한다면 나는 분명 그곳에 좀 더 가까워진 상태였다. 경탄할 준비를 마친 학생처럼 달뜬 마음으로 미술관에 들어섰다.


전시장 내부는 아름다운 혼란으로 가득했다. 형형색색의 이름들, 책들, 엽서들, 포스터들, 천가방들로부터 어떤 일관성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책은 하나의 우주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저마다의 색과 폰트를 공리로 삼은 우주들이 눈앞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어지러운 열기 속에서 나는 곧 익숙함을 느꼈다.


가장 먼저 들른 부스는 <일간 이슬아와 친구들>이었다. 나는 이슬아씨를 알고 있었다. 세 번이나 구독 신청을 놓쳐 <일간 이슬아>는 한 편도 읽어본 적 없으면서, 뻔뻔하게도 그녀를 안다고 생각한 이유는 우연히 읽은 <남과 나>라는 글 때문이었다. 타인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글을 곱씹는 대목에서 그렇지, 맞아, 어쩜 이렇게 똑같지 하며 탄성을 연발했더랬다. 단발의 이슬아씨는 우아한 동작으로 사람들의 인사에 응답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그녀 앞에 선 나는 구독을 못해서 대신 책을 사러왔다며 어물댔다. 그녀는 괜찮다고, 고맙다고 말하며 역시나 우아하게 싸인을 해주었다. 고개를 꾸벅하며 책을 받아드는 것으로 그날의 쇼핑이 시작되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본질은 시장이다. 시장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다만 보통의 시장과 차이가 있다면, 여기에서는 파는 사람이었던 누군가가 사는 사람으로 둔갑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듯했다.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파는 사람과 만든 사람이 대개 일치한다는 사실, 그리고 기술의 발달로 인해 만든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구매결정의 과정이 다시금 그들의 시야에 놓인다는 점이었다.


기민하게 진열대를 살피던 나의 눈에 언제부턴가 부스 뒤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2할의 시간은 파는 데, 2할의 시간은 팔기 위해 노력하는 데, 절반 이상의 시간은 지나치는 사람들을 앉아서 바라보는 데 사용하는 사람들.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올려졌다가 내려오는 걸 볼 때면 그 높이만큼의 파도가 마음에 출렁이는 기분이 들까. 사랑과 우울과 자신도 모르는 그 너머의 감정을 투입한 결과물이 모두의 열광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을 테다. 그러나 희망을 현실에 오려맞추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부스 뒤에 앉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뒤로 무언가를 집어들 때는 더 조심스럽게, 더 찬찬히 들여다보려고 했다. 혹시라도 우둔한 내가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더 있다면 놓치지 않기 위해서. 사지 않고 내려놓을 때는 아쉬움을 온전히 표현하려고 애썼다. 얕은 동정심에서 비롯된 연기가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몸짓 언어에 가까웠다. 저는 이 작품을 사지 않지만 그건 이 작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 잔고가 부족해서입니다, 라는 뜻의 언어. 솔직하게 말해서, 언젠가 만들어질 나의 책이 사람들 앞에 놓일 때 비슷한 대우를 받길 소망하는 마음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함께 갔던 애인이 혼잣말하듯 물었다.


- 그 사람들은 왜 팔릴 거라고 생각했을까?

- 어?

- 자기 표현을 위해 만든 데 불과한, 하지만 마음을 힘껏 퍼부어 만든 결과물을 어떻게 남들이 사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입 안이 간질거렸다. 무언가 뱉어지려 하고 있었다. 진지해서 더 유치하게 들릴 법한 말이었지만, 주저하는 틈에 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 너는 사람을 믿어?


질문은 애인과 나 둘 모두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동시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건 우리가 질문의 전제에 함께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람을 믿지 않고서는 그런 작업물을 만들 수가 없다. 자신의 작업물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줄 거라고 믿는 사람들, 아름답고 슬프고 재능 있는 사람들. 사람을 믿는 사람들.


믿음의 강도와 성과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행사가 끝나고 누군가는 믿음을 더욱 강고하게 굳힌 반면 누군가는 믿음을 수정하기로 결심했을 수도 있다. 모든 작가는 각자의 믿음을 주인공으로 한 방대한 서사시를 써내릴 수 있지만, 위기로 가득한 이야기가 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소리없이 시들고 만다. 이때 이야기를 지속할지 말지 판단하는 건 오직 작가의 몫이다. 작가가 자신의 믿음을 끝내 틀린 것으로 판명짓더라도 타인은 개입할 수 없다. 그 말고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고통과 숙고가 결정을 만들었다.


다만, 틀린 믿음의 일부는 탈락되지 않고 남는다. 손에서 손으로 건네져 선물이 되고 지침이 되었다가 어느 책상 위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바로 그 책상에서 새로운 믿음을 만들어낸다. 이 장면은 작가의 시야 밖에 있다. 그러니까 모든 작가는 자신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믿음의 재생산에 참여하는 중이다.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그 사실만큼은 옳다.  


지금도 나는 믿어- 와 믿고 싶어- 사이를 오가는 중이다. 분명 한쪽으로 기울어 있던 마음의 추가 일주일 뒤에는 반대쪽으로 넘어가있는 걸 발견하고는 한다. 아직은 시작하지 않아서 틀리는 게 더 무섭지만, 언젠가는 지금의 두려움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순간도 오겠지. 그때는 또 그때의 불신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결국에 내가 틀리더라도 어딘가에서 단 한 번은 옳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오래 기억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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