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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el Oct 20. 2018

레디-메이드 인생이란

어쩌면 내 자존감이 떨어진 데에는...

어쩌면 내 자존감이 떨어진 데에는 지금 레디-메이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Ready-made보다는 Hand-made를 선호한다. 당장 마음에 드는게 없다면 비효율적이고 공수가 들더라도 만들어내고 만다. 효율적이고 그럴 법한 대체제를 고를 수 있는데도 말이다. 꽤 귀찮은 타입이다. 그런데 거대 조직에 들어가면서 이를 꿈꾸는 건 사치가 되어버렸다. 거대 조직이야말로 레디-메이드의 정수니까. 크게 차이도 없는데 빠르고 공수도 덜 드는데 사소한 거에 목숨을 거는 건 미련으로 취급된다. 이 조직에서 내 역할이란 앞서 존재하던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기성(旣成)을 유지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게 마냥 나쁘다는 건 아니다. 좋은 레디-메이드를 따라하고 밟아간다는 건 배움의 기회일 것이다. 문제는 그런 기회를 마주한 적이 매우 드물다는 거지. 초반엔 이 곳에서 핸드-메이드의 영역도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으나 '입 아프게 떠드는 아이'처럼 취급을 받으니 이제는 두 손 두 발 놓았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레디-메이드 인생을 사는 셈이다.


예전엔 내가 스스로도 제법 재주도 많고 매력적인 사람이란 생각을 했는데 레디-메이드 기준에 맞춰 살다보니 사실 뭘 잘하는 지도, 어떤 점이 매력적인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요즘의 나는 지금 출근길 마주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게 없어 보이거든. 그들을 깎아내리는게 아니라 정말 마주치는 수준으로만 나를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니까 자기 효능감도 자기 존중도 느낄 수 없고 더 나아가서는 삶이 지루하고 권태롭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조직의 일원이 아닌, 개인의 삶은 처절할 정도로 핸드-메이드에 가깝다. 가능한 매번 매순간 다르게 삶을 가꾸어나간다. 글을 쓰는 지금도 밤새 이수에서 무비올나잇을 하고 왔다. 여의도에서 글쓰기 모임이 끝나면 삼청동에 위치한 미슐랭 레스토랑에 가서 맛난 점심을 먹고, 오후엔 트레바리를 갈 것이다. 개인의 시간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보낸다. 하루는 성운이가 '나혜 누나는 본인이 행복해질 수 있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흑. 그게 개인의 삶에서만 적용되는게 서글프다. 한 편으로는 이렇게라도 꺾이지 않는 내가 대견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혹시 모르지. 어느 순간부턴 핸드-메이드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 좋아질 수도. 


이러나 저러나 한 가지 바람은 자존감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2년 전의 나와 다르게 소심해졌다며 안타까워하는 동기의 말에, '너 혹시 회사에서 구박받니?'라는 종무 오빠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마음이 아프지 않아질 정도로만! 지금은 비록 레디-메이드 인생을 살지언정 나는 레디건 핸드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지. 맞춰야만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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