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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Sep 18. 2018

인간 종 너머로 뻗어 보는 더듬이

비인간 동물권에 대한 생각

더듬이

누군가의 말이나 글을 관찰하다 보면, 특정한 어휘나 문장이 자주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어떨 때는 그러한 어휘가 그 사람을 상징하는 하나의 시그니쳐Signature처럼 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러한 시그니쳐 문구들이 있는데, 대게는 어디선가 읽고 들어 인상에 깊이 박힌 것들이다. 자주 사용하는 '더듬이'라는 단어의 출처는,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환상소설 작가인 '이영도'의 소설 <그림자 자국>이다.  

이루릴은 왕지네의 눈 속에 떠오른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어요. "당신, 마음 더듬이가 길군요." - <그림자 자국>, 이영도

이영도 작가 특유의 따스한 감성과 주변을 낯설게 느끼도록 하는 독특한 시야가 담긴 문장이다. 보통 우리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시력이나 청력 등에 비유한다. 바라본다, 청해 듣는다 등. 그에 반해 다소 생경한 표현인 더듬이는, 누군가의 마음을 더듬어 헤아리는 공감각적인 상상을 가능케 한다. 더불어, 저마다 다른 수준의 공감 능력을 표현하기에도 매력적이다. 


또 다른 매력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더듬이는 인간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감각기관이다. 공감의 범위를 그저 인간 종에 그치지 않고 다른 종에까지 확대하려 할 때, 훌륭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해 본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한 달 전 '배달의 민족'에서 실시한 '제 2회 치믈리에 자격시험' 행사장에 비인간 동물권 활동가들이 시위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2018-07-22, 제 2회 치믈리에 자격시험장에서 시위를 벌인 동물권 운동가들



비인간 동물권을 바라보는 시야

꽤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동물권 운동가들의 주장에 부정적이었다. 최소한 온라인 댓글 여론은 그러했다. 개인의 선택에 맡기라는 이(너희만 먹지 않으면 되지, 왜 나한테 먹지 말라고 강요해?)가 있는가 하면, 적법성에 초점을 두는 사람(합법적인 행사에 불법적인 시위를 한 거 아냐?)도 있었다. 대승적인 차원에서는 동의하지만 그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는 사람(현실적으로 다들 고기를 즐기는데 나 혼자 채식을 하는 게 되겠어?)부터 적정 수준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닭은 먹으면 안 되고 물고기나 조개 같은 어패류는 괜찮다는 거야?)까지 매우 다양했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동물권 운동가들은 '모두 육식을 멈추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주장하지 않았다. 비록 궁극적 방향은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들이 지난달 시위에 나와 소리 높여 위친 주장은 "동물의 생명을 유희 거리로 소비하지 말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꽤나 유쾌하고 신선한 마케팅 행사로 평가받던 '치믈리에 자격시험'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국내에 더 많은 치킨 소비를 촉진하고, 그로 인해 '배달의 민족'의 이득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은 기존 치킨 사업자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유쾌한 문화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치믈리에 자격시험 이전 '배민 신춘문예' 같은 행사 역시 같은 목적을 위한 마케팅 행사였을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확산하는 것. 배달의 민족의 시선은 쉽게 이해할 만큼 명쾌했다.


그렇다면 동물권 운동가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1일 1 닭"이라는 멘트 자체를 섬뜩하게 해석하는 그들이, 바라보는 숫자는 다음과 같다. 한국육계협회에서 발표한 2017년 국내에서 도축된 닭의 숫자는 9억 3600만 마리다. 9억 3600만. 정상적인 생태계라면 9억이 넘는 닭이 1년 동안 태어나는 것도, 자라는 것도, 심지어 죽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닭은 생명이 아닌 식료품으로 취급되어, 생산되고 성장되어 출하될 뿐이다. 공장식 축산업은 30년 동안 살아야 하는 닭을 각종 호르몬을 통해 30일 만에 덩치를 자라나게 한다. 하청업자로 전락한 양계업자들은 비용 대비 효율을 맞추어내기 위해 햇빛이 들지 않는 제약된 공간 속에서 육계의 생산과 유지에 전념한다. 당연스레 면역력이 떨어진 닭들에게 AI가 찾아들기라도 하면, 일주일에 수천만 마리의 닭이 산 채로 땅에 묻힌다. 



고민의 깊이

누구나 다른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다. 현대인 어느 누구도 손쉽게 공장식 축산업을 기피하고, 그로 빚어진 육류 섭취로부터 해방하기 쉽지 않다. 그런 말을 하고 싶어 쓴 글이 절대 아니다. 다만, 이 거대한 시스템이 숨기고 있는 잔인한 숫자들을 타인에게 해방하고자 하는, 조금의 각성을 촉구하는, 더듬이의 길이를 다른 종에까지 보다 늘여달라는 사람들의 외침에 너무도 쉽게, 반사적으로 답변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유희를 유희로 소비하는 사람과, 그 내면의 비극을 구태여 끄집어내는 사람 중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누군가의 힘든 투쟁 때문에 자기 마음의 편안함이 무너진다고 너무 화내지만 않기를 바란다. 유기견/유기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다른 동물들(심지어 식물까지)을 들먹이며 위선이라 비웃지 않기를 바란다. 보신탕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이죽대지 않길 바란다. 비록 그럴지라도, 인간 종을 넘어 보호받는 종이 보다 늘어나는 것이 비극 일리는 없지 않은가.


당신은 여전히 육식을 할지 말지의 여부는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누구도 당신의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 답변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를 묻고 싶다. 누군가의 주장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반사적으로 쉽게 답하는 것은 아닌지, 습관적으로 혹은 반사적으로 이죽대려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생명에 대한 윤리를 활자로나마 기억하고 있다면, 1년에 9억 마리라는 엄청난 숫자 사이에서 잠시라도 아연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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