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어쩌면 소생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점심시간이 막 지나간 토요일 오후였다. 서둘러 광화문 교보문고로 가야만 했다. 몇 달 전부터 기다렸던 강의에 늦지 않으려면 말이다. 세종대로 사거리는 늘 그렇듯 사람들로 붐비고 시위와 농성으로 혼란스럽다. 교보문고에 도착하니 강의실을 안내하는 배너가 보였다. 내가 고른 강의의 주제는 프레임의 저자 최인철 교수님의 '심리학에서 배우는 인생의 지혜'였다. 구두를 신고도 열심히 달렸건만 1,2분 정도 늦게 도착했고 우습게도 강연장 앞 로비에서 대기하고 계신 교수님을 마주치고 말았다. 아뿔싸, 그 순간 난 직장인에서 대학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강연에 앞서 간단한 이벤트를 하고 있어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를 여유가 있었다. 강연장에는 어린 학생들이 많아 보였다. 얼마 안 있어 교수님이 입장하시고 오늘 강의에 대한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셨다.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보다는 '무엇이 행복인지'에 대해 집중해보고자 한다며 전자를 기대하셨다면 실망하실 수도 있다고 미리 양해를 구한 후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셨다. 오랜만에 필기를 해보려니까 어색하기도 했고 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살짝 들뜨기도 했다.
강의의 골자는 행복이란 기본적으로 '쾌'한 감정이며 기분이며 작용이라는 점이다. 가령 고요함으로 인해 기분이 좋다면 이도 행복이다. 자연을 보고 경이로운 감정이 든다면 이 또한 행복이다. 다만 사람들은 행복이란 단어의 모호함 때문에 행복의 정의를 쉽게 말할 수 없다. 더불어 행복은 시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짧은 시간의 행복은 감정으로 해석되나 긴 시간에 연결되는 경우 단순한 감정 그 이상의 것을 누리는 삶을 뜻한다고 한다. 이는 개인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을 행복이라 해석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적 행복과 일맥상통한다. 문제는 우리는 짧은 시간의 행복도, 긴 시간의 행복도 모두 갈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쯤에서 작은 실마리가 풀리는 듯했다. 둘 다 갈망하는데 내 일상은 짧은 행복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순간순간 그토록 허무했던 것인가. 교수님은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 2시에 강의를 들으러 오신 분들은 후자의 행복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나는 사실 후자의 존재도 방금 깨달은 사람이라 그로부터 오는 괴리감에 살짝 씁쓸했지만 오늘이라도 알아차린 게 어딘가 싶어 스스로를 토닥거렸다. 그 이후로 지인들에게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전파하고 다녔다. 사람들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내용에 다들 크고 작은 자극을 받은 듯했다.
여전히 내게 단순한 감정 이상의 행복이 무엇인지는 물음표로 남아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자극받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믿는다.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그러나 개인적으로 내게 두 가지 형태의 행복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만으로 숨이 간신히 붙어있는 행복감에 생명력이 생기는 듯 했다. 우연히 얻은 생명력이 꺼지지않도록 틈나는 대로 그려볼 작정이다. 어떤 행복을 얼마큼 어떻게 취할지 말이다.
P.S. 뒤죽박죽 일상에 잔뜩 치이는 요즘은 이런 행복이 간절하다. 가을 단풍이 알록달록 예쁘게 물든 동네 끝자락에 위치한 한옥에서 동행과 2박 3일쯤 묵는다. (연인도 좋고 친구도 좋다. 그 누구든!) 스마트폰은 잠시 꺼놓고 책과 영화 몇 편이 담긴 노트북만이 오락거리의 전부다.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서 파자마 차림에 패딩을 껴입고 베이글과 커피를 사 온다. 베이글은 갓 구워져 입에 물 때마다 바삭바삭 소리를 낸다. 대충 허기를 채우고 따스한 햇살을 잔뜩 머금은 마루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점심쯤엔 동네 시장을 어슬렁거리며 팥죽이나 전을 주워 먹는다. 저녁을 제대로 차려 먹기엔 배부르고 그냥 자기엔 아쉬우니 일단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맥주와 오징어, 땅콩 따위로 저녁을 대신한다. 섬유유연제 향이 은은한 이불 위에 엎드려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첫 번째 영화가 끝나고 두 번째 영화가 시작할 쯤엔 둘 다 알게 모르게 잠들어 버리는 거지. 헤헤.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