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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운 Nov 16. 2019

자전거 탄 소년

The kid with a bike, 2011

나는 좋은 영화를 보면 운다. 화면이 아름다워서도 울고 노래가 좋아서 행복해서도 울고 인물에게 너무 이입한 나머지 대사 한 줄에 눈물이 쏟아지기도 한다. 그래도 극장 안에 있다는 의식은 남아 있어서 보통 입을 막은 채 쉰 소리로 꺽꺽거리는 편이다. 정말로 엉엉 소리를 내며 울어본 건 지금까지 세 번이 있다. <아무도 모른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그리고 어제 본 <자전거 탄 소년>. 어젯밤 나는 기숙사 빈 방에서 혼자 짐승처럼 울었다.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고 발을 쿵쿵 구르면서 울었다. 그렇게나 울어본 건 오랜만이었다.

세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아이들이다. 아키라가 열두 살, 무니는 여섯 살, 시릴은 열한 살. 세 아이는 서로 다른 독립된 인격체지만 비슷한 점도 많다. 무능한 부모를 뒀고, 그래서인지 지나치게 조숙한데, 여전히 아이의 본성은 가지고 있다. 두 성질이 충돌해서 갈등이 생긴다. 거기에 가난이라는 구조적 문제까지 개입해버리면 아이 스스로 손쓸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 모든 걸 어른은 알고 아이는 몰라서 어른이 운다. 어쩌면 아이를 볼모로 어른을 울리는 건 비겁하게 쉬운 일이다.

그래서 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은 잊히지 않을 질문 하나를 남기려고 애쓴다. 방금 흐른 눈물이 바로 말라버리는 대신 마음속에 개울을 지을 수 있도록, 어디에나 그 아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 있도록. 나는 아이들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물론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이다. 정답이 없으니 실효성 있는 행동으로 이어지기는 더 어렵다. 그러나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자신이 그렇지 않은 자신보다 낫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한 질문의 가치는 유효하다. 그 사람들은 행동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가 나아지기 위해선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게 전부니까.

<아무도 모른다>와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분명 질문을 남기는 영화였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주체성을 훼손하지 않음으로써 질문을 더 깊게 남기는 영화이면서, 손쉬운 해답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으니 쉽게 고민을 끝내서는 안 된다고 다그치는 영화이기도 했다. 나는 새롭게 배운 태도가 굽혀지는 일이 없도록 아키라와 무니의 얼굴을 마음속 잘 보이는 곳에 새겨두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어제, 빈 방에 앉아 <자전거 탄 소년>을 틀었다.

뭔가 이상했다. 영화는 질문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답이라는 것도 너무 간단해 보였다. 사랑. 사랑이래. 사랑이라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회구조의 문제를 지적해온 다르덴 형제가 이제는 그저 아이들을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보는 내내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설마 사랑일리가. 그게 얼마나 연약한 건데. 그리고 기껏 성공해봤자 개인의 문제밖에 해결할 수 없는 거잖아. 영화의 끝에서 내 예상은 절반만 맞았다.

다르덴 형제는 아이들이 사랑으로 인해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랑이 아픈 과거를 잊게 하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보장해준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이 사랑으로 인해 한뼘 자랄 수 있다고, 그래서 자신의 선택을 되돌아보고 배우고 수정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거였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람이 변하는 영화를 만든 거였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그 믿음이 너무 크고 따뜻해서 엉엉 목놓아 우는 와중에도 한 가지만은 잊지 않으려고 했다. 사람은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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