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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석원 Jun 12. 2022

위임과 책임

초기 스타트업은 대표 혹은 초기 멤버들이 회사의 모든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회사 커짐에 따라 일이 많아지면 기존 멤버들이 물리적인 시간 부족으로 인해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위임에 대한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위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내가 역량은 충분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손을 빌리는 형태와, 보다 나은 의사결정을 위해 특정 분야에서 나보다 역량이 뛰어난 사람에게 머리를 빌리는 형태이다. 전자와 후자에 있어 위임의 양상은 달라질 수 있다.


역량이 뛰어난 초기 팀 일수록, 머리보다는 손을 빌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답답함을 호소한다. 새로운 팀원들이 내놓은 결과물이 양에 차지 않고,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이크로 매니징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종종 마이크로 매니징을 그 자체로 악으로 묘사하는데, 사실 적은 인원으로 훨씬 높은 퀄리티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경우도 많다. 다만 시간의 제약조건(마이크로 매니징 자체로 시간이 소요 되기 때문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 애초에 손을 빌린다는 것은 하루 24시간이라는 내 제한된 재화를 더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도움을 받는 것으로, 이는 다른 사람과 나의 시간이 1대1 대응 관계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고로 설사 내가 하면 1시간 걸릴 일을 다른 사람이 3시간에 걸려서 하더라도, 내 1시간을 줄여줬다는 것 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란 뜻이다. 손을 빌리는 위임은 주로 내가 아니어도 되는 일을 덜고, 그 시간에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시간을 확보하는데 의의가 있다.


머리를 빌리는 위임의 경우, 손을 빌리는 것보다 조금 더 까다롭다. 해당 분야 만큼은 이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을 신뢰하고 위임하는 형태이다. 때문에, 때로는 내 생각과 다르고 동의되지 않더라도 믿고 넘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모르는 분야이기에 이 사람의 역량에 대한 평가가 어렵고, 이는 끊임없는 의심과 검증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소위 사짜에게 권한을 잘 못 위임하고 잘 못 신뢰할 경우 조직에 큰 피해를 주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머리를 빌리는 위임은 애초에 하지 않는게 맞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나처럼 경험이 부족한 채로 사업을 시작한 사람에게 머리를 빌리는 위임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머리를 빌리는 위임은 어렵고 불확실성이 높지만 내 손을 조금 덜어 양적으로 리소스를 확보하는 것 이상으로 조직의 의사결정 역량 자체를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질적 성장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때 위임 받은 사람은 훨씬 더 큰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보상도 훨씬 큰 게 합리적이다.


주의 할 점은 머리를 빌리는 위임이라 할지라도 위임한 사람이 위임 받은 사람에게 아무런 의견도 피력하지 않고 모든 결정권을 넘기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방치에 가까운 행동이고 무책임한 행동이다. 이렇게 위임할 경우 나중에 결과가 안좋을 때 왜 그런 이상한 결정을 내렸는지 질책하며 책임을 지우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위임하는 사람과 위임 받는 사람은 많은 사안에 대해 끝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가장 궁극적인 위임이란 두 사람의 뇌가 하나가 되어 다른 한 쪽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서로 납득 할 수 있다는 신뢰이고, 그렇기에 모든 사안에 대한 설명을 내가 듣지 않더라도 결정 자체를 믿게 되는 원리이다. 이때 결과에 대한 책임은 둘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위임 받은 사람들의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이다. 대표라고 모든 분야에서 뛰어날 수는 없으니 각각의 분야에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머리를 빌리는 게 되는데 (만약 나보다 모든 분야에서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 조직에 있다면, 그 사람을 대표로 앉히는게 옳다), 어떤 사안들은 분야를 넘나드는 의사결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류의 문제가 위임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살펴야하는 문제이다. 각 분야의 상황과 그 분야를 위임 받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의사결정을 내려줘야 한다. 이런 문제는 주로 애매하고 답이 딱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어떤 선택을 내려도 한 쪽에게 욕 먹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너희들끼리 알아서 결정해라, 나한테는 결과만 보고해라 처럼 회피하는 선택은 최악이다. 이런 선택을 내려주고 결과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는게 최종의사결정권자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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