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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석원 Jun 19. 2022

메타 인지의 중요성

서울대 교수 성추행 사건이 한창 시끄러웠을 때, 교수 중에 유난히 또라이가 많은 이유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과연 교수라는 자리가 또라이를 만드는 걸까 아니면 또라이가 유의미하게 교수가 될 확률이 높은 걸까. 고민 끝내 내가 내린 결론은 전자였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긍정적인 관계도 있지만 때로는 실수를 통해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때 그 사람의 반응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선'을 인식하게 된다. 이 선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끝없는 상호과정을 통해 더 정교해지고 속해 있는 집단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옮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 이 피드백 루프가 끊어질 경우, 끊어진 채로 오랜 시간이 흐를 경우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는 아주 먼 사고를 가지게 된다. (실제로 논란의 교수는 “네가 나를 기분 좋게 해주면 내가 연구를 많이 하고 그게 인류에 이바지 하는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교수는 사회적 피드백이 끊어진 환경에 방치되기 아주 쉬운 직업이다. 누구에게도 머리 조아릴 필요가 없는게 가장 큰 장점인 동시에 위험이다. 과연 나는 그런 환경에서 20년, 30년 동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을 지금도 느끼고 있다. 사회적으로 더 많은 힘과 권한을 가질수록 이러한 위험에 빠지기 더 쉽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주는 피드백은 점점 줄어들고(직언을 하는 사람이 없어짐은 물론이고, 심지어 비언어적 피드백 조차 감지가 어려워진다) 내 스스로 객관성을 유지할 필요성(권력을 가지게 되면 굳이 남을 신경쓰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은 낮아진다. 그렇게 고립 되어가는 것이다. 결국 본인이 유머러스하다고 믿는 꼰대 부장님 되어버리고 만다.


나는 메타인지가 안되는 사람을 싫어한다. (사실 이게 내가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이 되는 것을 과하게 두려워하는 이유인가 싶다) 싫어하는 이유는 대화가 안되기 때문이다.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은 그 사람의 지적 판단 능력과 무관하게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본인이 유머러스하다고 믿는 부장님께 사실 당신의 유머는 정말 재미가 없고, 부하 직원들이 비위 맞춰주려고 재밌는 척 해주는거다 라는 얘기를 했다 생각해보자. 부장님이 어떻게 반응할까? 어이쿠 내가 재미가 없었구나 라며 인정할까? 그렇지 않다. 부장님이 선택(귀인)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이다. “지난 몇 년 간 나 혼자 재밌다고 착각했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한심 했을까?”(내적 귀인) 아니면 “지금까지 내 개그에 웃어준 애들이 몇 명인데 너가 이상한거 아냐?, 지금 나한테 시비걸어?”(외적 귀인). 열 중 아홉은 외적 귀인을 택하기 마련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모습과 실제 본인의 모습 간의 간극이 커질수록, 더더욱 그 간극을 인정할 수 없기에 그나마 받게 되는 피드백은 모조리 외적 귀인으로 넘겨버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악순환에 빠지기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주는 아주 아주 작은 피드백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피드백을 준다는 건, 아직 내가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이란 애정의 표현이며, 그 자체로 관계의 소중함을 내포한다. 피드백은 한번 끊어지면 그 다음은 없다.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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