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마틴의 연설문을 통해서 지금까지 숙제로 남겨진 많은 의문이 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하나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딱히 그가 무슨 답을 주었다기보다는 그의 말은 내가 스스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극해 주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마틴의 연설문은 새로운 시각으로 이제껏 활용하지 않고 잠재되어 있던 나의 능력을 사용하도록 활성화시켜 주어 삶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마치 새롭게 운동을 시작해서 안 쓰던 근육을 다시 쓰는 것과 같이.
삶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지평이라는 말에는 약간 어폐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새롭다기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알고 있었지만 실행하지 않아 가슴 한편에 묻어 두었다가 잊어버린 것이라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어렴풋이 기억 속에 남아있던 많은 것들이 올라오며 새삼스럽게 의미와 가치로 다가왔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마틴과 함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존재 자체가 큰 모범으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틴을 통해서 드러난 인간 존재는 참으로 아름답고 성숙하지만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더 의미 있고 더 희망적으로 다가왔다. 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내가 추구하던 이상적 모습이기에...
내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뭐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내 영혼이 채워지고 있었다. 아니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해방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껏 쌓아온 잡동사니 지식 조각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며 청소하는 것 같은 기분, 내 존재의 가치를 다시 인식해 나가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인식해 나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마음의 상처가 하나하나 아물어가고,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치유되고 있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마틴의 말에서? 그가 전하는 분위기에서? 그렇기도 하다. 그의 말은 어떤 주의도, 주장도, 아닌 진리와 생명의 기운인 초월적 가치와 연결되어 전하는 맑은 샘물과도 같았다. 그래, 그것은 혼탁한 의식에 쏟아붓는 한줄기 맑은 물로 내 영혼이 정화되어가고 있었다. 마틴이 길러낸 생명수는 나에게 마중물이 되어 내 속의 정화수를 길러내도록 도와주었다.
어릴 적 학교에는 수돗가에 펌프가 있었다. 그곳에서 물을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마중물을 한 바가지 붓고 계속 펌프질을 하면 처음에는 흙탕물이 쏟아지다 한참 후에는 맑은 물이 나왔다. 마틴은 쓰지 않아 녹슬어 그 존재마저 잊어버린 내 영혼의 펌프를 재가동시키기 위해 자신이 기른 마중물을 내 영혼에 쏟아부으며 펌프질을 계속하라고 한다. 처음 펌프 사용법을 배울 때 몇 번이나 실패하면 어머니가 계속하면 된다고, 자꾸 해보라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쉬워진다며 격려해 주던 일이 생각났다.
그분이 다시 나에게 같은 일을 해보라며 시범을 보이고 있다, 이번엔 내 영혼의 펌프질을 해보라며 자신의 펌프를 통해서 길러진 맑은 물을 계속 쏟아붓고 있었다. 그가 하는 연설은 그의 말이기보다는 마틴이라는 인간 펌프를 통해서 길러진 영혼의 샘물로 근원에서 나온 생명수였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도 내 펌프를 통해서 나의 샘물을 길어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맑은 샘물과 같은 영성과 생명수가 나의 능력만큼 그리고 내가 준비된 만큼 나를 통해서도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으며 스스로 자신의 도를 닦아나가며 실천함으로써 본인의 능력과 힘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이 쏟아붓는 한줄기 맑은 물은 물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과 함께 쏟아붓는 축복의 의식이었다. 마치 세례 요한이 물로써 거듭남의 의식을 행했듯이, 마틴은 그의 말로써 축복의 세례를 보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연설을 시작하면 주변 공기와 분위기가 마치 불이 켜지는 듯이 바뀌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고도의 정밀 기계로 화학적 변화를 측정한다면 나타날 것처럼 분명하게, 내 감각의 촉수에는 선명하게 감지되는 무엇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느낄 뿐, 의식하지 못한 채, 그냥 분위기 좋다는 정도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그는 누구인가? 그분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껏 들은 말로는 ‘참 나’ ‘참 존재’로 돌아가고 회복하라는 것이었다. 돌아가라는 말은 돌아갈 곳인 고향이나 근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회복하라는 말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며, 잃어버리고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탕자의 비유가 생각났다.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나서 거지가 되어 방랑하고 있는 탕자가 바로 내 모습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돌아가야 하는 아버지의 집은 어디인가? 내가 놓치고 벗어난 것 그래서 회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의 근원과의 합일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판단하고 작위적인 태도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가겠다고 나선 것, 그것이 바로 낙원에서 쫓겨난 것이며 생명의 나무로부터 축출된 것이 아닐까?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이미 존재하는 도와 진리는 무엇이며 나는 그 존재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내가 돌아가야 할 곳과 회복해야 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의 회귀가 아닐까? 도와 진리는 이미 존재한다. 생명도 존재하며 나도 존재하고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며 그 근원이 진리며 도이자 아버지의 집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 근원과 본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성경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어서 축출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포기함으로써? 그 선악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태도, 더 나아가서는 작위적으로 생명을 본인의 의지와 이해관계 또는 호불호에 따라서 사용하려는 이지적 태도가 바로 근원과 본질로부터 벗어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아버지의 집에서 나온 탕자와 같이. 그렇다면, 아버지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성경과 기독교에서는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의 근원과 본질로 회귀하는 것, 우주적 기운과 합일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나라는 존재는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기운이 나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전달되고 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생명의 근원에서 나오는 천상의 음악이 흐를 수 있고 우주적 질서가 재창조될 수 있다면, 이 땅에 지상낙원을 이루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 아닐까? 이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