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샘
아주 어릴 적으로 기억된다. 겨울의 끝자락에 목을 움츠리고 집을 나서다가 길가에 핀 노란 민들레가 눈길을 끌었다. 어머니와 나는 반가움에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민들레와 친한 친구 같은 가까움을 느꼈다. 이 추운 겨울에 민들레는 어디 있다 나왔는지 궁금해졌다.
“민들레는 어디서 왔어요?”
“추운 겨울 땅속에서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다 나왔지”
“누가 불렀는데요?”
“바람할매가 불렀지”
“그 할매가 누군데요?”
“천지신명과 함께 살지”
나는 버릇처럼 끈질기게 물었고 천지신명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매일 아침 정화수 한 그릇 올리고 기도하는 대상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기도드릴 때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분위기상 마음을 가다듬고 같이 기도했다,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무엇이며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서 있으면, 어머니의 기도는 천지신명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당신이 기도드리는 대상의 실체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고 막연하게나마 어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 대한 간구였던 것 같다. 어쩌면 기도를 통해서 스스로 위로받았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대상은 바로 어머니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모호한 대상을 향한 기도와 간구는 우리 어머니와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친구 딸의 일기가 생각난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딸의 일기에는 소박한 소망과 기도가 적혀 있었고 그 뒷장에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응답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 잘 들었다. 그런데 네가 공부를 잘하고 싶으면 스스로 열심히 해야지
그런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그러니 네가 알아서 해라.”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생각난다. 어쩌면 이 아이가 하느님과 신의 존재에 대해서 무의식적인 직관으로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넘쳐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잠도 잘 자지 못했던 것 같다. 비몽사몽간에 미친 여자처럼 맨발로 내 의식의 밑바닥을 헤집고 다닌 것 같았다. 한 번씩 아드레날린이 뻗치면, 기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온 집안 청소를 해대던 나의 습관대로. 열병을 실컷 앓고 난 사람처럼 탈진해버린 것이다.
꼼짝없이 누워있는 텅 빈 방에는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몸의 한기와 함께 존재의 한기를 느끼며 아스라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릴 적 우리 집 앞에 있던 우물가에서 바위틈 사이로 올라오는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아무리 마셔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갈증이 잦아들자 물속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한 아이가 우물 속 깊은 곳에서 해맑은 모습으로 천진스럽게 웃고 있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 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라고 김영랑은 노래했다.
나도 내 존재의 어디엔가 작은 샘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내 느낌에는 머리 쪽인 것 같기도 하고 가슴 쪽인 것 같기도 해서 약간은 헛갈리지만, 그 어딘가에 마르지 않는 샘물이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다. 평소에는 그 존재를 잊어버리고 지내다가 문득문득 기억나고 가끔 그곳과 연결되기도 했다.
어떤 지혜의 샘 같은 것이 있어 스스로 감동하거나 나도 모르는 무엇이 이 샘을 통해서 길러지고 흘러넘치는 것을 느끼곤 했다. 이 샘과 한동안 멀어졌는데, 그래서 내 존재 밖으로 밀려났었는데 이제야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이다.
마틴과 다른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내 영혼에 쌓인 찌꺼기와 돌멩이들을 치우며 나는 샘을 치우고 있었다. 다시 영혼을 채워주고 존재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맑은 물이 올라오기를 기대하면서.
어릴 적 가뭄이 들면 동네 사람들이 날을 받아 버려둔 샘을 쳤다. 온갖 찌꺼기들과 잡동사니들을 다 긁어내고, 물길이 잡히도록 파주고, 열어주고, 그리고는 기다렸다. 처음엔 물이 잘 나오지 않고 흙탕물만 고이다가 다시 퍼내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맑은 물이 고였다. 퍼낼수록 많이 고이는 샘물, 내 영혼의 샘은 계속 퍼내지 않았기에 말라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샘에 다시 조금씩 물이 고이기 시작했으며 나는 맑은 물을 퍼내기 위해 샘을 청소하기에 온 정신이 몰려있었다.
이렇게 내 가슴속에 존재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 바로 내 삶의 근원이고 원동력이며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내 안에 거하는 하나님’이 아닐까? 이 샘은 나에게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우물과 같이 더 근본적인 우주적 근원과 연결되어 하나로 이어지는 통로와 같다.
어머니는 절에 갈 시간이 없으면 내 속에, 내 가슴에 계신 부처님께 기도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신은 저 멀리 우주의 잘 알지 못하는 어디에 숨겨진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며 부처도 나와 함께 생명의 샘으로 연결되어 호흡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내 속에 있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현실 생활 속에서 신성과 불성이 구현될 수 있을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주적 메시지와 소명이 나를 통해서 구체적인 실현과 역사로 전해지며 이 땅에 구현되는 것이 아닐까? 내 안의 성소로 여겨지는 샘을 따라서 전체와 하나로 연결되며 마침내 근원적 지성소와 합류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