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들

가족

by 최선화

가족

엄마가 시집오던 날, 온 동네 사람들과 일가친척들이 새색시를 보기 위해 모였다. 드디어 가마 문이 열리고 새색시가 내리자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눈을 의심했다. 시집오는 새색시가 품에 어린아이를 안고 내린 것이다.

역병으로 부인을 잃은 큰 외삼촌의 아이를 시집 안 간 막내 고모인 엄마가 키웠다.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되자 어린것이 엄마 품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엄마도 차마 떼어놓지 못해 결국 시집오면서 안고 온 것이다.

친정 조카를 안고 와서 키우는 새댁의 마음도, 이런 상황을 겪는 시댁 식구들도 모두가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속에서도 서로 인내하며 불쌍한 어린것을 돌보는 일을 사람의 도리로 여기며 키웠다. 다행히 아버지는 별 거부감 없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시할아버지는 어린것을 볼 때마다 혀를 차며 못마땅해하셨다고 한다.

어려운 시절 입 하나 더는 것도 일인 때에 형편이 좀 나은 집이라지만 층층시하에 살면서 친정 조카를 데려다 키우는 엄마가 얼마나 많은 눈치를 살펴야 했을까? 그런 속에서도 아이 마음 다치지 않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일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키운 조카가 결혼해서 아이를 넷이나 낳고 살다가 갑자기 병으로 죽은 것이다. 아이들은 한창 커가는데 가장이 없는 집의 형편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엄마가 다시 이들 가족을 거두었고 아버지는 아이들 교육비를 대주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주셨다. 내가 어릴 적 방학이 다 끝나가면 그 집 큰 아들이 우리 집에 와서 며칠씩 머무르는 이유를 그때는 몰랐다.

동화 속 이야기 같고 듣기만 해도 가슴 찡한 이야기다. 우리 부모님이 특별한 분들 이어서 이런 일은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때는 주위를 돌보며 함께 사는 것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된 윤리였다. 핵가족인 내 가족만 가족이 아니라 먼 일가친척도 어려우면 도왔고 혈연공동체의 연대의식과 서로 간에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며 살았다. 그래서 시댁도 마뜩잖았지만 그렇게 애쓰는 며느리를 마음으로 갸륵하다 여기며 존중해주었다. 아무리 엄마가 조카들을 돕고 싶어도 그 시대에 혈연공동체에 대한 사회적인 연대감이 강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처조카의 자식들까지 돌보는 일은 아버지로서도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서 천자문, 명심보감과 삼강오륜을 배운 아버지로서는 처가에 대한 도리와 사람으로서의 의리라는 강한 윤리의식이 자리했다. 더구나 독립운동하다 희생당한 처가에 대한 부채의식도 깊이 작용했을 것이다. 본인이 직접 나서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남겨진 자손들을 돌보는 것이 도리라 여겼다.

바로 우리 부모님의 이야기인데도 이런 이야기가 무척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가족과 사회적 연대감과는 많은 괴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 이런 이야기는 마치 신화나 전설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한 감동이 밀려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단순한 향수 때문일까? 아니면 바로 그런 연대감의 회복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들이 올라오며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면서 하나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 같다. 그것은 이런 연대감을 나눈 것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라는 점으로 한동안 잊고 살았던 기억들을 다시 떠올려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충분히 복원 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헬레나 호지의 ‘오래된 미래’처럼 지금 우리가 복원해 나가야 할 연대감과 공동체는 과거와는 형태나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혈연이나 법적인 관계를 넘어서고 단순한 돌봄을 넘어선 공생과 공존이라는 절박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는 사람들 간의 상호의존을 넘어서 생태계 전체와의 공존에 대한 필요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 절실함과 현실적 요구 때문에 더 따뜻하고 품위 있는 새로운 모색과 인류의 삶의 방식에 대한 대전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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