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
연휴 때, 복잡한 로터리에서 내 앞 차가 나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계속 정지해 있었다. 뒤에는 긴 줄이 늘어져 있는 상황인지라 내가 무슨 일인지 살펴보며 먼저 나가려 하자 앞 차가 나오는 것 같아, 경적을 울리고 먼저 빠져나왔다.
그게 사건이 되어 나를 따라오며 계속 경적을 울리고 창문을 내려 삿대질을 하고 뭇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도로에는 차가 가득하고 마음대로 차선을 바꾸기도 힘든 처지에 분노에 찬 위험한 질주가 계속되었다. 경찰에 보호를 요청하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전화기가 멀리 있어 꺼낼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는 험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꾸기보다 먼저 나 자신부터 평정심을 회복하고 마음의 중심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소리쳐도 눈길도 주지 않고 내 갈 길만 집중해서 이어갔다. 그때 주변에 있던 운전자들은 이유도 모르고 상황도 파악되지 않은 채 소음공해로 인해 상당한 심리적 피로감을 느꼈을 것이다.
한참을 지나도 내가 꿈쩍도 하지 않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리치며 제 갈 길을 가버렸다. 아마도 스스로 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사실 내가 그 상황에서 크게 잘못한 것도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그쪽을 쳐다보며 살핀 것이며 부딪힐까 봐 경고음을 울린 것뿐이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뭔가를 감정적으로 자극한 것 같았다. 아니면 이미 화가 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심리적 공해를 입은 것이 미안했다.
문제의 차가 방향을 돌려 사라지자, 그제야 안도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아무런 반발심 없이 함께 참아주고 인내해준 다른 운전자들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으로나마 전하는 일이었다. 누군가 참지 못해 소리치거나 같이 경적을 울렸다면 더 큰 시비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내 편에서 보면 어쨌건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감정적인 자극을 받았다면 사과할 일이고 순간적인 실수에서 벗어나서 내 존재의 바른 자리를 회복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다음은 각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질 일이다.
다른 사람을 먼저 변화시키려 들며 따지거나 언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나의 바른 자리를 찾고 중심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거기서부터 화난 사람과는 다른 관점과 행동이 생겨날 수 있다. 사과하든 무시하든 아니면 차를 세우고 경찰을 부르든지... 그 어느 것도 먼저 나를 바르게 추스르고 나서 취할 행동이다. 그렇지 않게 되면 감정적인 부딪힘이나 상황에 휘말려버려 더 수렁으로 빠져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다 사소한 시비가 감정싸움으로 번져 엉뚱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순간적인 나의 실수를 인정하고 순간순간 깨어있는 것이, 그리고 바른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스럽게 다시 알게 해 준 작은 사건이었다. 이럴 때 자칫 잘못하면 십 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 될 수 있다. 아무리 근사한 말과 이론을 머리에 쌓아두었다 해도, 매 순간 바른 선택을 하고 중심을 유지할 수 있는 깨어있음이 없다면 단지 공염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진정한 삶은 실천에 있는 것이지 지식이나 이론의 수집이나 축적이 아니다. 이미 아는 것도 실천을 통해서 검증되고 다시 익어지고 넓혀져야 한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앎과 지식은 진정한 앎이 아니며 아는 채 하는 몸짓이나 껍데기에 불과하다. 요란하고 소란스러우며 거드름 피우는 지식이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하며 조용한 실천과 삶이 진짜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공중에 나는 새는 학교나 학원에 가지 않고도 어떻게 삶을 이어가는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은 어미로부터 배우고 독립해서 살아가면서 스스로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생명 속에는 스스로 살아남는 힘과 지혜가 내포되어 있다. 이와 같은 힘과 생명력이 우리 속에도 있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위험에 처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랬음에도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 머리를 넘어선 삶의 충동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뛰고 있는 심장이 바로 그 증거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과 앎을 누가 알려주었는가? 그동안의 학습을 통해서도 알게 되었지만 필요한 순간마다 떠오르는 영감과 지혜의 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그렇게 순간순간에 열려있고 깨어있으며 초점이 맞추어졌는지가 차이를 만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