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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화 Nov 29. 2022

빛의 성전에 이르는 일곱 계단

지혜

지혜     

 지혜는 아는 자가 능동적으로 실제로 아는 것이다. 지혜는 경이로운 이의 신성하고 거룩한 마음이 활성화된 본질이다. 지혜에는 의심이나 주저함이 없다. 지혜 안에서 영원한 실재를 의식적으로 알며, 영원한 존재가 지속해서 빛을 발산한다.

 사람의 지성으로는 지혜 자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지혜는 축복받은 자가 경이로운 이와 빛나는 합일을 이루게 되면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지속해서 지혜롭게 사는 자가 아버지의 빛나는 현존에 영원히 거하며 본인 마음먹은 대로 하려는 행동을 포기한 사람이다. 인간의 지식과 지성을 따르는 자는 아무리 지식이 많다고 해도 실제적이고 영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지시하에 행동하는 사람은, 내적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외적 고요함 속에 머무르며, 필요한 지식은 이미 존재하기에 더는 얻거나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즉, 지혜는 이미 존재하기에 사람 마음으로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주님 집의 문지기가 된 복 받은 자는 겉마음은 주인의 종일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고로 겉마음은 아무런 결정이나 선택도 하지 않고, 단지 내적인 방향에 따라서 복종하는 것임을 안다. 내 안에 거하는 주님께서 모든 질문을 정하시고 겉 자아는 그것에 따른다. 주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겉 자아를 통해서 그 해결책이 드러나게 한다.


 지혜는 안에 거하는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 안에서, 모든 세상일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는 지혜로울 수 없다. 지혜는 모든 일에 완벽한 방향을 제시해 주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겉 자아를 통해서 드러난다. 자신을 통해서 지혜가 드러나도록 하는 사람은, 주님의 모든 계획과 활동을 종이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게 되면 복 받은 자는, 지혜가 이끄는 대로 어떻게 될지 염려하지 않고, 주어진 순간에 복종한다. 그럼으로써 축복받은 자는 믿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는 완벽한 믿음의 핵심을 알게 된다. 주님 안에서 하나로 초점을 맞추게 되면 이 순간의 영원성을 알게 되고 주님의 지혜에 따라 지금 그리고 요구되는 매 순간 행동하게 된다. ‘말하는 이는 네가 아니라 네 안에 계신 아버지의 영께서 말씀하신다’(마태복음 10:20) 이것이 지혜의 길이다. 이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현존에 대한 깨달음 안에 머무르며, 경이로운 이의 모든 빛의 발산에 응답한다. 사랑의 빛을 발하라.





 처음 예수의 행적에 관한 글을 읽었을 때, 놀라움과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래, 그는 신의 아들이지 그러니 그럴 수 있지. 나는 사람의 자식이니 그와는 다르지...

 사실, 내가 학문을 하겠다고 나선 이유도 지혜로운 이가 되고 싶어서였고 열심히 하다 보면 지혜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을 진작 알았었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공부기에 살아가는 방편으로써는 괜찮은 일이라 여겨 계속했다.  

   

그러다 사람의 자식인 나도 예수와 비슷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침내 찾게 되었다. 예수도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경이로운 이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도록 한다면 되는 것이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합일 안에서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미 없으며 그 길만이 지혜의 길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렇게 지혜의 길은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샘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지혜롭기를 원하며 지식이 많이 쌓이면 지혜로워질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지식과 지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식은 제한된 상황에서의 가설이나 추론에 의한 이론에 불과하지만, 지혜는 즉시성과 현실 적합성을 지닌다. 즉, 그때 그 순간의 상황과 장소에 부합하고 적절히 맞아떨어져야 한다. 따라서 지식이 모여서 지혜가 될 수 없으며, 지혜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따라서 지혜는 경이로운 이의 신성한 마음의 핵심이다. 지혜를 통해서 영원한 근원적 존재를 의식적으로 알게 되며, 경이로운 이와 하나 될 때 지혜가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겉 사람이 자신의 의지나 생각을 멈추고 현존 안에 거하게 되면 지혜 속에 머무르게 된다.  

   

사람의 겉마음은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선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지혜는 주님의 것이며 미리 알 수도 없고 필요한 순간 바로 그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신뢰하고 따라야 할 것이다.

공중의 새는 날아갈 방향을 어떻게 아는가? 여우는 어떻게 허허벌판에서 먹이를 찾는가? 책을 통해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생명 자체에 내재된 방향타와 충동을 따라서 살아간다. 하물며 인간이야말로 안에 계신 주님을 믿고 주어진 순간의 지시를 따른다면 자연스러운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매 순간 경이로운 이의 빛의 발산에 응답하며 사랑의 빛을 발산하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야 할 가장 필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더 많은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인의 치유, 환경의 치유, 인류의 치유, 지구 전체의 치유 등 많은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알 수 있다. 

 특히 나같이 사회복지와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에게는 사회복지 실천과 개입의 많은 부분이 상처와 아픔을 다독거리고 살아갈 용기를 심어주며 절망한 사람과 의욕을 잃어버린 이들을 위로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치유의 필요성을 더 절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도움을 제공하기 위한 전문직인 사회복지 방법론과 기술적 개입은 많은 다른 전문직과 마찬가지로 한계를 가지며 사회복지 서비스로 전해주고 해결해줄 수 있는 서비스에도 한계가 있다. 그럴 때마다 진정한 치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러한 치유가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러한 의문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전문가로서 아니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선한 이웃으로서 당연한 추구이며 질문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치유된 상태는 어떤 것인가? 단지 일상생활에 적응하고 겉으로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상태인가? 아니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인식하며 의욕과 기쁨에 차 있는 상태인가? 소위 말하는 메슬로우의 절정 경험을 누리는 상태인가? 모든 순간에 희열과 절정 경험을 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해도 스스로 인내할 수 있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며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상태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와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까?     

 많은 사람은 살아오는 과정에서 이런 경험들을 해왔으며 지금도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그런 경험을 가끔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경험들을 좀 더 지속해서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할 수 있다면 치유가 일어난 것이며 스스로 치유되어가는 상태가 아닐까?

 

우리 자신의 경험을 더듬어 보면 어떤 조건에서 이런 경험들이 이루어졌는지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긴장하고 공포심을 느끼거나 분노에 찬 상태에서가 아니라 고요히 마음을 비우고 감정이 가라앉았을 때 이런 경험들이 좀 더 쉽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태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 또는 순응하는 상태 또는 좀 더 적극적으로는 환영하고 감사하는 순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면 마음을 비우고 다 놓아버렸을 때 일어나는 새로운 채워짐의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좀 더 깊이 분석해 보면 사람의 지식과 머리 굴림 또는 자의적 판단이라는 자가발전적인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애쓰는 마음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 더 큰 우주적 지성이나 질서라고 할 수 있는 더 큰 힘과 연결이 이루어지며 그 연결에 의한 신성한 채움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주는 소립자에서 우주 천체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으며 어떤 거대한 지성에 의해서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질서에 의지하기보다는 작은 두뇌에서 나온 지식과 자의식 속에 갇혀 고립되어 머리 굴림이라는 자가발전에 의지해서 살아가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려있다. 사실 사람들 속에서도 이미 세포와 신체는 우주적 지성의 원리를 따라서 작동하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뛰고 있는 심장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평안과 위안 그리고 감사 또한 그 증거다.     

 그러나 머리와 의식 차원에서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기보다는 자가발전으로 고립되어 더 큰 질서에서 벗어나 따로 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의식이 바로 이런 우주적 질서와 지성을 받아들이고 그 질서에 순응한다면 치유는 좀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손가락을 다쳐서 피를 흘리는 바로 그 순간부터 치유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명의 본래적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는 치유 상태는 자의식과 자가발전을 중단하고 우리 자신을 비우고 맡길 때 자동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어떤 거대한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우리를 창조한 그 힘이 우리를 돌보며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러니 믿고 맡기며 큰 질서를 따라는 것이 인간 삶의 회복과 치유의 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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