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감사를

by 최선화

삶에 감사를

지금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삶이 얼마나 신비롭고 자비로운지 그 은혜에 고개가 절로 숙어진다. 모자라는 사람이 선생이 되어 30여 년을 바삐 지냈지만 별로 한 일은 없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과 학생들을 돕기 위해서 이것저것 해 보았지만 별반 해준 것도 없고 내세울 성과도 없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내가 보기에 상황적으로나 개인의 특성 면에서도 가장 어렵게 느꼈고 저들이 이다음에 어떻게 살아갈지 큰 걱정을 한 학생들의 90% 이상이 지금 보면 아주 훌륭한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중증장애를 가진 학생, 가정 경제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던 사람, 폭력의 희생자가 된 사람, 개인적인 무력증으로 우울과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한 사람, 타인에게 말 못 할 고민을 안고 가슴앓이를 하던 여학생, 중증질환을 앓던 사람들 등등 사연과 형편은 다 달랐다. 그런데 세월을 지나면서 이들이 다시 기운을 회복해서 자신의 영역에서 마치 별일 없었던 것처럼 잘 살아가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로.

어릴 적 사고로 성대를 다쳐 목소리를 잃은 학생이 찾아와서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러 번 상담을 했다. 목소리가 없는 사람을 위한 일자리는 고사하고 자원봉사 기회조차 찾기 힘들었다. 정말 앞이 보이지 않았고 내가 도와줄 길이 막막했다.

졸업식 날 산청에서 올라온 부모님을 먼발치에서 보았지만 내가 먼저 피해버렸다. 소박한 농부로 보이는 나이 든 부모님이 장애를 가진 아들을 힘들게 대학에 보낼 때는 분명 어떤 살길을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길도 열어주지 못한 죄책감에 그분들 앞에 나서 인사를 하기조차 부끄러웠다, 졸업 후에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던 졸업생이 어느 날 말쑥하고 밝은 표정으로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공무원이 되어서, 그리고 2년 뒤 신문에 커다란 기사가 떴다. 우수공무원으로 큰 상을 받게 되었다고. 공적을 살펴보니 감동적이었다.

이들에게는 젊었을 때의 어려움이 도리어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삶을 살아가는 큰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산다지만 그들이 지나온 폭풍우와 어둠은 가혹하리만큼 혹독했다. 나도 도와주고는 싶었지만 길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위로와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던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었다.

역시 삶은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 관대하며 우리 젊은이들은 나보다 더 강했고 더 상상력이 풍부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어 내는 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긴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고 삶의 가혹한 담금질을 견뎌낸 그들 앞에는 눈보라가 지나고 따뜻한 봄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그들이 스스로 독한 추위 속에서도 봄의 동산을 준비해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 우연히 본 절벽 끝 소나무에 감동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들 가운데도 척박함 속에서 향기로운 꽃을 피워 낸 사람들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삶을 산 사람들도 많고 더 진한 감동을 주는 사람도 있다. 좀 거칠어 보이거나 투박해 보여도 그들이 지나온 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의 삶이던 자세히 보고, 알고 보면 겉모습과는 다른 상상을 능가하는 일들이 숨겨져 있음에도,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우리 자신과 이웃 모두의 삶에 위로를 보내며 그 노고에 감사하자, 그들 모두 덕분에 우리의 일상이 평온할 수 있음에. 삶이라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어둠 속에서 헤매는 고단한 삶이었다 해도 결국은 빛으로 이어지고 한바탕 너털웃음으로 털어버릴 수 있기에 삶은 역시 살만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굽이진 생을 묵묵히 이어올 줄 아는 멋진 사람들이다. 아무도 공짜로 살지 않는다, 그러니 서로에게 감사하고 서로에게 더 너그러워지며 수고했다고 격려하며 다독여 주자.

세상에 잡초는 없다. 단지 그 가치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의 삶도 아직 그 가치를 충분히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며,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이런 삶에 무한한 감사를... 그리고 모두에게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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