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by 최선화

귀향

오랜 세월 바쁘게 지내던 사람이 퇴직해서 어느 날부터 갑자기 모든 일에서 벗어나서 빈둥거리며 지내는 것이, 처음엔 좀 어색했고 마치 내가 할 일을 않고 게으름을 부리는 것 같아 약간의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러던 것도 이제는 익숙해지다 보니 내 존재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마음의 평화와 고요를 누리고 있다.

마침내 내 삶에 여유로움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언제나 일과 책임 그리고 의무에 떠밀려 쫓기듯 살아왔다. 그야말로 시간 도둑들에 떠밀리며 정신없이 지내왔다. 무슨 일이 생겨도 시간적 압박감으로 부담감과 불안이 먼저 올라왔다. 그래서 긴장하고 여유가 없었으며 피로감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얼마나 스스로 지쳐가며 몸이 힘든지도 모르고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동분서주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 내가 누리는 정신적 여유와 평화가 고맙고 반갑다. 이제야 좀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빨리 끊어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친절히 받을 수도 있고, 지인들의 안부를 먼저 챙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며 서투르지만 잘해나갈 것이라 믿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줄 아는 아량과 인내심도 생겼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평화와 고요가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제야 비로소 나답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오면서 마음의 평화와 균형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그렇게 살지는 못했다. 특히 체력적으로 힘이 모자라는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여유와 휴식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을 하며 자신을 갈아먹고 소진시켰다. 이러한 선택은 스스로 한 것이기에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더구나 정의감에 불타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고치려 들고 맞서다 보니 내가 먼저 탈진해 버렸다.

그동안 사회복지 분야가 확장한 만큼 일이 많았고 이 분야에 종사한 사람들 대부분에게 과부하가 걸렸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나같이 체력적으로 부실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게 내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며 책임이라 여기며 동분서주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단지 내가 지혜롭지 못했으며 마음의 여유와 정신적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무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더 효과적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니 지금의 한가로움과 안식이 내게는 너무도 소중하다. 사람이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중요하다고 여기며 목숨을 건 일도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집착이었고 헛것이라 여겨진다. 다만 그때 그렇게 충실했기에 지금은 지금에 충실할 수 있어 다행스러울 뿐이다. 행동이 존재의 질보다 앞섰고 말로는 존재를 중시한다고 했지만, 존재의 고요한 정점에서 충분히 관조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딪히며 좌충우돌한 것 같다. 돈키호테 이야기가 바로 내 모습이었다니 어이없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러니 이제는 본향으로 돌아와서 존재의 집에 고요히 머무르며 또 다른 차원의 삶을 누리고자 한다.

세상사 돌아가는 법칙을 이미 어느 정도 알며, 일하고 싶은 만큼 해보았기에 여유롭게 바라보며 더 큰 우주의 운행질서와 법칙을 믿으며 바라볼 수 있는 믿음과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세상사보다는 내 존재의 밭을 갈고닦으며, 정직하게 직면하고 무성히 올라오는 잡초를 뽑고 일구어나가는 일에 몰두하고자 한다. 조금만 게으름을 부려도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마음으로 내 존재의 뜰에 청정함을 지키고 싶다.

지나간 일들은 모두 지나간 것으로 흘려보내며 새로운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 움직이는 삶의 맥박에 귀 기울이며 진정한 삶의 순간들을 누리고 싶다. 어리석게도 내가 원하던 것, 하고 싶었던 것들과 이상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하며 사는 것을 진실하고 가치 있는 삶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도 얄팍한 개인적인 욕심 내지 욕망으로 부질없는 짓거리였다. 마치 광활한 우주라는 바다에서 어린아이들이 쌓는 모래성과 같은 장난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를 넘어선 우주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 장대한 교향악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리고 싶다. 그리하여 할 일 없이 바위에 앉아서 피리를 불며 이나 잡고 지내지만 발아래 세상을 모두 품어주고 다독여주는 신선 같은 모습이 나의 꿈이 라면 그것 또한 지나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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