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고모
내 유년의 기억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워 그리움을 자아낸다. 시골 대가족의 늦둥이로 사랑받으며 자유롭게 자랐다. 베이붐 세대의 선두주자로 전쟁 직후라 온 나라가 가난했고 먹고사는 일이 지상과제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은 가난으로 찌들지 않았고 재치 넘치는 엄마 덕에 웃음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으로 큰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집 옆에 살던 큰고모로 술주정뱅이와 성격파탄자였다. 내 기억 속의 고모는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며 울부짖거나 아니면 술병이 나서 앓아누운 모습뿐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어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고모가 술에 취해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 모두를 괴롭혀도 어느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 없이 모두가 침묵하며 참아주었다. 고모네에 관해서는 집성촌의 그 흔한 험담마저 없는 금기사항 같은 무엇이 있었다.
마을에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 어른들이 우리 집 사랑방에 모여 할아버지와 의논했다. 그리고 동네 어른들이 덕곡 아재네 가게 앞마당 평상에 당사자들을 불러 해명도 듣고 야단도 치다 결국은 술판이 벌어졌다. 그런데 고모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여가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더욱이 마을 최고 연장자인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그래서 동네 사람 누구도 함부로 간섭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속으로 모두 우리 할아버지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비겁하다고 여겼다. 동네가 시끄러워지는 일이 지속되는 데도 방치하는 것은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같았다. 마을에서 다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고모의 행패, 특히 만만한 우리 엄마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무례와 폭언을 막아선 유일한 사람은 대가 찬 큰언니였다고 한다. 하루는 보다 못해 맞아 죽을 각오로 큰고모에게 대들며 엄마를 방어했지만, 도리어 엄마한테 혼이 났다고 한다. 나는 언니만큼 강하지도 못해서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고 어른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난 후 고모는 내 기억에서 멀어졌다. 다시는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고향을 생각하면 고모가 떠오르며 왜 고모가 그랬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우리 집에서도 고모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모두에게 아픈 기억과 수치심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라 여겼다.
고모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져 가던 어느 날, 고모의 큰며느리인 사촌 새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이미 쉰내 나는 나를 2살 때 보고 처음 본다며 여전히 우리 아기씨라 부르며 손을 잡고 볼을 비비던 백발노인의 살가운 행동에 나도 모르게 우리 집안의 금기를 깨버렸다. 왜 고모가 그렇게 되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고 하자, 새언니가 전해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고모의 둘째 아들은 자식 중에 가장 잘난 인물로 그 당시 경북대 학생으로, 해방 이후 혼란기에 많은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좌익운동에 가담했다고 한다. 그러다 거물급이 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아들을 구하려고 논밭이랑 재산이란 재산은 다 팔아 넣었지만, 6.25 바로 직전에 작은 소포가 집으로 전달되었다고 한다. 가족도 모르는 사이 이미 사형이 집행되었다며 유품을 보낸 것이다. 그날로 고모는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술로 살았으며 고모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일은 집성촌 가족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한동네에서 함께 자라 모두가 내 자식이고 내 가족처럼 살아온지라 이 일은 비단 고모네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모가 모두를 원망하며 소리치고 욕을 해도, 술에 취해 한밤중에 온 동네를 미쳐서 돌아다니며 잠을 못 자게 행패를 부려도, 모두 이해하고 인내하며 함께 견디어 낸 것이다. 고모의 아픔이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의 아픔이기에 온 동네가 고모를 감싸주며 모진 세월을 함께 살아낸 것이다.
어릴 적 집성촌에서 자랐기에 공동체의 울이 어떤지를 알고 항상 그리워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공동체 의식의 부족이라 여기며 공동체 정신을 복원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가족이 당한 아픔이 그나마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감싸고 인내심을 발휘하며 견디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모에 대한 나의 오해와 미움 그리고 가족에 대한 수치심이 눈 녹듯 사라지며, 진정한 공동체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