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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다정함 Feb 01. 2024

버티는 자가 살아남는다

버틴 자와 포기한 자 

서울에서 개인전을 오픈하고 그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이의 눈에는 나는 나의 갈길을 묵묵히 가는 작가이기도 하고 다른 이의 눈에는 N잡러의 삶을 사는 프리랜서다. 어쨌거나, 나는 아직도 '작업'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작가 친구들은 말한다. 계속해야 돼. 버티는 사람이 살아남는 거야. 


왜 작업을 잘하는 사람이 살아남는다고 말하지 않을까? 물론 미술에 있어 잘함과 못함의 기준은 상대적이기도 하고 작업을 '잘하는 사람'이 곧 '잘 나가는  사람'은 아닌 경우는 우리는 많이 봐왔다. 때로는 인맥 때문에, 학벌 때문에, 동문이라서, 누가 끌어줘서, 누가 밀어줘서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서있다. 작가 생활에 관해 논할 때, 주로 우리는 이 상태를 버티며 유지한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마치 우리의 상태는 줄다리기를 할 때 발에 온 힘을 주고 땅을 밀어내며 버티고 있는 것인 냥, 왜 우리는 '살아가며' 예술가가 되지 못하고 어느 순간까지는 '버티는' 예술가가 되어야 할까.


예술가에게 있어서 작업을 해온 기간이라는 것은 인정을 받는 편이다. 음악가에게 있어 짧은 수련기간은 그들의 천재성을 되려 부각하곤 하나, 예술가에게는 묵묵히 걸었던 그 수년의 시간, 특히 무명의 시간을 견딘 자에게는 약간의 인정 특혜가 따른다. 더군다나 그 무명의 시간을 견디고 성공을 이룬 작가는 길었던 버팀의 시간을 돈과 명예로 보상받게 된다. 천국에 입성한 가난한 자와 같다. 


버틴 자의 과거의 작업은 재조명되나 버티지 못한 자의 과거 작업은 잊혀야 할 어린 시절의 열정이다. 버틴 자의 작업은 더 이상 그 내용이나 모습이 흥미롭지 않더라도 버텼기에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런 자의 말은 귀담아들을만한 것이며 버티지 못한 자는 현실과 타협한 자, 포기한 자이다. (능력 부족이었을까? 더 노력해야 했던 걸까? 지원금 제도의 싸움에서 패배한 걸까?) 


버팀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약 10년 간의 작가 생활을 해오며 이 삶을 버텨낸 것, 살아낸 것에 약간의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버틴다는 것은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쉽지는 않은 일이다. 물론, 돈이 많으면 도움은 될 것이고 버틴다라는 생각을 덜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작업의 인정과 관심을 목표로 자신의 관심사를 깊게 펼치고자 하는 이들 모두에게 버팀이란 어렵지 않을까. 


정확히 우리는 무엇을 버티는가? 사람들의 시선을 버텨내고, 가족의 한심한 눈초리를 버텨내고, 수없이 마주하는 거절의 이메일들을 버텨내고, 내 작업의 비루함을 버텨내고, 불안정한 프리랜서 생활을 버텨낸다. 버틴다는 것은 미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미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현재에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발을 조금이라도 헛디디면 당겨지는 힘에 끌려 앞으로 딸려나갈 것만 같다. 땅을 붙잡고 있는 두발은 안간힘을 다해 이 현재를 움켜쥐고 있지만, 너무나 세게 움켜쥔 바람에 그 감각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2024년에는 버티지 않는 시도를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언젠가 줄은 끊어지기 마련이다. 미래의 영광은 현재의 나에게 돌리겠다. 두 발로 가볍게 땅 위에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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